●

서울행 기차에서 잠결에 바라보는 들판은 지난 겨울의 삭막한 느낌과는 달리 아름다워 보였다.
'농공단지'라는 엉터리 정책으로 만들어진 흉물스런 공장들이 몇달 사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꿈결이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촉촉히 젖은 채 뿌연 빛을 뿜어내는 창밖의 풍경...
거의 17년, 8년전의 초여름이었던 것 같다. 학교 빼먹고 집에서 낮잠을 자다 깨어난 오후, 밤색 나무결의 옷장이 너무도 아름다워 한참동안 그것만 바라본 적이 있었다. 어느 글에선가 그것을 제대로 묘사하려 했지만 결코 그러지는 못했다.
마치 물속 같은 아련한 굴절. 부드러운 탄성을 지녔을 듯한 마음만의 감촉...
내 방이라기에 그것은 너무 낯선 느낌이거나 선명한 착시였고, 물속이라기에 그 풍경은 지나치게 맑은 것이었다. 그날 이후 어쩌다 낮잠에서 깨어나면 그런 느낌을 가지려 유심히 마음을 모으곤 했으나 그날 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들 가운데서...
잠시 잠을 깨고 일어나 열차와 열차 사이의 흡연칸에 서서 담배를 피워무니 이 노래가 절로 흥얼거려졌다. 연기는 좁은 가슴에 갇혀 머무르고 얼레는 끝없이 돌아 또 그 자리, 그릴 戀 풀어져 날아가는 하늘...
어딘가 출장가는 듯한 옆좌석의 중년남자가 어찌나 다소곳하게 조심하던지 도리어 미안한 마음이 들 만큼 나는 편안하였다.

아득히 돌아가는 천릿길
가을바람이 차다
이럴 때면 머리에 백발이 는다
(진우, 나그네) 
 

2000. 5. 22. mklee(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