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냥 테레비라고 해야겠지 신기한 전자음으로 리모콘을 누르는게 아니라, 드르륵 찰칵 채널을 돌려야 하는, 내가 리모트 컨트롤 당해야 하는 테레비 말이야

뮤직 비디오를 보면 부러운 것들로 가득하지 분위기 있는 목소리도 있고, 고뇌가 그의 표정으로 느껴지는 기타리스트의 화려한 애드립도 있지만 정말 부러운 건 그런게 아니야 그 속에 나오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야 그 또는 그녀는 멋지게 괴롭다는 것이지

너와 나만이 지저분할 뿐이야, 너와 나만이 아귀다툼처럼 싸우는 거지 우릴 제외하면 그 속의 세상, 그 세상의 괴로움은 멋진 거야

나를 컨트롤 하는 저 텔레비전을 봐 어두운 표정을 지으면 하늘도 그에 맞춰 잔뜩 찌푸려지지 내가 슬프면 어쩌면 그렇게도 억수같이 비가 내리지 요염하지만 결코 천박하지 않게 속옷이 비치거나, 가로등 아래 그림자가 멋있게 늘어져 있지 한번도, 단 한번도 나는 그런 걸 경험한 적이 없어,

지쳐 쓰러지는 건 언제나 슬로우 모션이고 눈물 방울은 수정보다도 아름답지 그 멋진 괴로움은 카메라에, 조명에 그리고 정교하게 준비된 소도구와 조연들 속에서 극대화되지 단 한번도 나는 그런 걸 경험한 적이 없어 누가 시를 읽겠어 누가 꿈을 꾸겠어 멋진 괴로움, 슬픈 즐거움을 만들어낼 수 있는데, 피도, 방황도, 꼬이고 꼬인 인생도 다 부질없고 머리 아픈 것들일 뿐이지

누군가 그걸 혐오하는 사람이 있다면, 모두가 봐도 아닌 것 같다면, 감독은 컷을 외치고 다시 찍으면 되지 그걸로도 부족하다면 버추얼 리얼리티가 아니라 리얼 버추얼리티를 카피해내면 되지 그래서 멋진 괴로움의 세상을 나는 볼 수 있는 거지

멋진 신세계, 멋지게 괴로운 세상 속에서 달과 별과 삶에 대한 온갖 아름다운 글로도 내 동경과 정성은 부족하여 내 눈엔 가끔 검정색과 흰색밖에 보이질 않아, 내가 가끔은 흑백처럼 느껴져 꼭 내 몸 만큼의 공간에 결코 운명적이지도 비극적이지도 멋있지도 않게 무덤덤한 흑백 필터가 켜지곤 해, 내 눈에 흑백 필터가 씌워지곤 해, 그것은 거울처럼 같지도 다르지도 않은 세상을 보여주는 렌즈인지도 몰라

누가 시를, 꿈을, 괴로움을 생각하고 느낄 수 있겠어 보면 되는 것인데, 그것으로 끝인데, 거기 음악이 더해지는데 누가 더 생각할 필요가 있겠어
만약 아직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냥 테레비라고 해야겠지,
흑백.
 

1998. 10.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