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남녀의 편지를 훔쳐본다면 그것은 재미있는 일일까요 ㅡ 절호의 기회가 여기 있습니다. 
다행이 선물로 받은 것이 아니었다면 내가 서점에서 이 책을 사서 읽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어린이들 그림책 같은 장정에다 엽서에 손으로 쓴 글씨, 책장에 붙여진 편지봉투 속에서 꺼내읽는 편지... 소인이 찍힌 그림엽서 속의 사연들... 
그냥 보면 사춘기 여중생에게나 어울릴 것 같은 유치한 구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장정에 공이 다들어간 책 같습니다. 예쁘장한 타이프체의 편지나 우편엽서, 우표, 봉투들... 이런 것들이 실제로 책 속에 들어 있습니다. 
(편지지를 아트지가 아닌 정말 편지지를 사용했다면 더 좋았을 것 같고, 봉투에 든 편지는 책장에 붙이지 않고 책 속에 그냥 끼워뒀더라면 더욱 좋았을 것 같은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번역자는 상당수의 추리소설을 번역한 분으로 내가 즐겨 읽어 왔었기에 반가운 느낌도 있었고, 어느 정도 읽을거리가 되리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대단히 어울리지 않을 부끄러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책을 처음 읽기 시작한 것은 화장실이었습니다. 앞의 몇페이지를 거기서(!) 읽었는데 생각보다 재미있었습니다. 

사비네라는 여자의 엽서로 시작되어 그리핀과 사비네는 십수통의 서신을 교환합니다.
이 책의 소설적 구성은 간단합니다. 사비네와 그리핀의 엽서와 편지글일 뿐입니다.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그리핀은 사비네라는 여자에게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그리핀이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그림을 알고 있는 신비스런 여자입니다. 그녀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리핀의 그림이 자기의 머리속에 떠오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핀 모스

          마침내 연락이 되어 기뻐요.
          당신의 물고기 그림엽서를 한 장
          얻을 수 있을까요?
          당신이 옳았던 것 같아요 ㅡ
          포도주잔이 컵보다 더 강한 충격을 주더군요.

          사비네 스트로헴
          사서함 1, 카티에, 시크몬 제도, 남태평양

그리핀은 엽서를 그리는 화가이며, 사비네는 남태평양의 시크몬 제도라는 곳의 조그만 섬에서 우표를 도안하는 일을 합니다.
결국 그리핀은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사비네를 열렬히 사랑하게 됩니다. 그녀에 관해서 알고 싶어 하며, 공통된 생각과 느낌들을 나눕니다. 
 

사비네는 처음부터 끝까지 본심이 어떤 것인지 완전히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리핀은 사비네를 사랑함과 동시에 흔들리기 시작합니다.(약간의 착오가 있었는지 아니면 의도적인 것이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글씨체에 묘한 뉘앙스가 있습니다. 그리핀은 예쁘장한 여자 글씨이며, 사비네는 흩날리는 필체로 남자 글씨 같습니다. 왜 그렇게 뒤바뀌어 있는 것일까요?)
 
 

          그리핀 ㅡ 사진은 가능할 것 같지 않아요.
          대신 내 모습을 그려서 보내 드리죠. 실제보다
          더 낫게 그린 셈이에요. 하지만 그건 
          예술가로서의 우리 특권 아니겠어요 ㅡ 우리가
          원하는 대로 우리 모습을 기록한다는 것.
          참, 나와 동질의 영혼을 지닌 그리핀,
          내 얼굴을 엽서로만 보고 만족할 건가요?
          정말 날 보고 싶으면 이리로 오시면
          되잖아요. 당신을 막을 게 뭐가 있겠어요.
          당신은 당신이 있는 곳에서는 불행한 게
          틀림없는데.
          오세요.

          사비네.
 

하지만 끝부분은 좀 허망하였습니다. 두 사람이 겨우 사랑과 이해의 물꼬를 트기 시작한 시점 ㅡ 그들이 만나기로 약속하자마자 이야기는 끝이 났습니다. 어떤 이유인지 언급이 없지만 그리핀은 그녀를 만나기를 두려워 하였습니다.
'실제적인 만남'의 단초가 된 것은 사진이었습니다.그리핀은 그녀의 얼굴이 너무 궁금해서 사진을 보내달라고 했습니다만 사비네는 자화상 엽서로 대신하며 그럴게 아니라 자신을 만나러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리핀은 당황해하고 소극적으로 행동합니다. 그러자 사비네 자신이 그리핀을 보러 가겠다며 나섭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아무런 결말도 없이 끝나고 말았습니다. 

몇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실은 그리핀과 사비네가 동일인물로 그리핀이 만들어낸 가공의 연인일 수 있을 것입니다. 같은 의미이지만 그 반대로 그리핀은 사비네가 만들어낸 연인일 수도 있겠지요. 그리핀이 사비네의 사진을 보고 싶다고 했을 때 그녀는 사진 대신 자신의 얼굴을 그려서 보내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그녀 자신이 가공의 인물이라는 이야기도 되겠지요. 만나고 싶어하니 오라고 했음에도 그리핀은 그녀를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사비네는 그리핀을 찾아갔을까요...

이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사비네의 마지막 편지는 자신이 그리핀을 찾아간다는 것이었습니다만 작자(!)는 야속하게도 그 결과를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어쨌거나 그리핀은 그의 작업실에서 사라져버렸고, 이들이 주고받은 편지묶음만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이들의 만남이란 어떤 것이었을까요.

이 책의 절반 이상은 잠들기 직전에 누워서 다 읽었습니다. 그림책 같이 유치한 구성을 가진 책, 뻔한 이야기였습니다만 가끔씩 책을 펴고 봉투속에 든 편지를 꺼내어 읽어보곤 합니다. 어리석은 그리핀.
 

1999. 6. 24. jjlee.
 

PS.
1. 닉 벤톡은 화가이자 작가이며, 이런 식의 구성으로 만들어진 "Pop-Up Book"의 창시자라고 합니다.
2. 섬들이 있는 바다 지도와 런던 시내 (아마 지하철 노선도인듯)의 지도가 순차적으로 겹쳐있는 표지 안쪽 장정도 나름대로의 상징을 갖고 있습니다.
3. 보고 있는 배경 그림은 그리핀의 요구에 사진 대신 사비네가 보낸 자신의 초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