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헝클어진 위계질서 아래에는 신성불가침한 층위가 놓여 있다.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1595년의 런던.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세계와는 조금 다른 곳이었습니다. 엄지손가락에 눈을 가진 경비원, 젖꼭지에 눈이 달린 매춘부, 변색하는 수염을 가진 괴물같은 세익스피어, 알지 못할 세계의 '뮤즈들'로부터 날아온 훌륭한 희곡 작품들, 카시오페이아의 W가 술취한 듯 비틀어진 채 하늘에 걸리어 있는 세상...
세익스피어의 실존 자체부터가 논란거리인 터라 "세익스피어는 누구인가"에 관한 많은 논설에서부터 세익스피어에 관한 미스터리, SF까지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뮤즈> 역시 세익스피어를 소재로 한 단편으로 SF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환상소설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세익스피어를 흠모하며 그의 비밀을 밝혀보겠다는 많은 사람들이 시공항법장치를 사용하여 세익스피어를 찾아 나서지만 기대와는 좀 다른 장소에 나타납니다.
일부 세익스피어의 시대와 비슷한 상황도 있지만 살펴보면 우리가 존재하는 세상과는 조금씩 다릅니다. 주인공이 방문한 곳에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괴물에 가까운 존재들이 살고 있고, 세익스피어 또한 흉칙한 괴물입니다. 우리가 현존하는 세상과는 동떨어진 곳의 세익스피어이지요. 그는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갖고 오는 '책'들을 그대로 베껴 작품을 발표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시공을 초월한 수미쌍관을 이루는 셈인데... 이런식의 해결법이라면 인류역사의 많은 미스터리들에도 쉽사리 갖다 붙일 수 있겠지요. 피라밋의 건축법에서부터 에스겔이 목격한 '전차'까지...
<뮤즈>에서의 시간여행은  합리적인 인과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상상의 세계로 이어집니다. 그런 면에서 그것은 시간여행이라기 보다는 무한한 수로 존재하는 다차원 우주의 한 단면에 직면하는 것이겠지요.
이 세계에서의 세익스피어는 마치 <수호지>에 나오는 십자파의 주막 부부처럼 자신을 흠모해서 찾아오는 시공여행자들을 죽이고, 소중한 '원고'를 빼앗고, 금품을 차지하는 악당입니다. 물론 괴물 세익스피어에게 있어 시공을 넘나들어 다가오는 전혀 다른 존재들은 뮤즈에 다를 바 없을 테지만 말입니다.
그것은 마치 M. C. 에셔의 대표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인 <손을 그리는 손>처럼 원인이 결과를 만들어내고 결과가 원인을 합치시키는 세상입니다. 만약 뮤즈가 자기 자신의 영감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면 나름대로 충분히 납득가능한 허황됨입니다. 

이 단편은 기본적으로 '다차원 우주론'이나 '고무판이론'에 근거한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하나의 가설로서의 다차원 우주론에 의할 것 같으면 우리는 수많은 '경우의 수' 또는 다양한 가능성과 그 결과가 동시에 무한히 겹쳐진 우주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지금 <뮤즈>에 관한 시덥잖은 글을 쓰고 있는데, 또다른 우주에서 나는 세익스피어에 관한 평론을 쓸 수도 있을테고, 아예 글쓰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평범한 회사원으로서 열심히 일하고 있을 수 있고, 아예 '나'라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우주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차원 우주론이란 이러한 다양한 상황들이 우리가 이해못할 공간에서 동시발생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 것이겠지요. 
'고무판 우주론' 역시 비슷한 원리입니다. 하나의 '우주적 원형질'에서부터 독립된 별개의 우주가 무한이 발생하여 존재한다는 가설인데 이 역시 무한한 경우의 수를 발생시킵니다. 지금 우리가 존재하는 '우주'는 그 원형질이 만들어낸 무한한 기포 가운데 하나일 뿐일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브라흐만의 꿈'같은 것으로, 우주는 신의 꿈이며, '다른 곳'에도 우주가 널려 있어 저마다 각각의 신이 또다른 우주의 꿈을 꾸고...

버제스는 <베니스의 상인>을 인용하며 이 독특한 단편을 끝맺고 있는데 그 상징하는 바는 놀랍게도 세익스피어 자신의 '다차원 우주론' 같아 무척이나 흥미롭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마음으로 이어진 대상과의 필연적인 연결일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모든 의지, 수많은 사소한 선택들, 운명이라는 것도 시공연속체로서 무한히 겹쳐 있는 수많은 우주 가운데 하나를 만들어내는 엄청난 사건인지도 모를 일입니다.(버제스는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시계장치 오렌지>의 원작자이기도 합니다.)

인제니오 공작은 말했다.
"모든 지상의 생명은 비슷한 것과 닮은 것을 가지고 있으니 머나먼 하늘에서 우리의 인생을 누가 흉내내고 있으리라, 모든 것이 쌍둥이를 가지고 있고, 모든 행동이 쌍둥이를 가지고 있도다. 그 쌍둥이들이 또 풍부하고 무한하게 쌍둥이들을 가지고 있으니 심지어 이 별들도 쌍둥이가 있으리라..."
 

1999. 9. 11. jjlee(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