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내 눈까풀 위에 서 있다
그녀의 머리털은 내 머리털 속에 있다
그녀는 내 손 모양을 하고 있다
그녀는 내 눈 색깔을 갖고 있다
그녀는 내 그림자 속에 삼켜진다
하늘 위에 보석처럼
<사랑하는 여자, 엘뤼아르>

체체파리 tsetse flies 1
파리목 체체파리과의 곤충. 영명의 tsetse는 보츠와나 원주민의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소를 죽이는 파리'라는 뜻. 흡혈파리로서 인간에게 수면병을 발생시킨다.

한 남자가 자기 아내를 죽이면 사람들은 살인이라고 하지만, 이런 일이 보편화되면 생활 양식이라고들 한다.
ㅡ 앨런에게 보낸 앤의 편지에서

인류를 멸망시킬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무엇이 가장 손쉬운 방법일까요. 거기에 관해서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까요... 
라쿠나 셀던의 <째째파리의 비법>은 그것을 절묘하게 연계시킨 의미심장한 단편으로 '여성'의 의미를 독특한 각도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SF형식을 취한 이 단편은 '알지 못할 천사들'이 인류를 절멸시키는 방식과 그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많은 것을 보여줍니다.
인류라는 족속의 끈질긴 '생명 사슬'을 가장 손쉽게 제거하는 방법이란 인류에게 있어서의 '약한 고리'를 찾아서 끊어버리는 것이며, 그 약한 고리는 여성에 관한 남성의 지배욕과 우월감, 그리고 감추어진 가학성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단편은 '약한 고리'라는 멍에를 둘러쓴 채 어쩔 수 없이 죽음에 내몰리지만 '어떤 비법이 그녀를 무너뜨린다 한들' 끝내 당당할 한 여자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종교와 형이상학은 내분비선의 목소리일 뿐이다.
ㅡ 센바이저, 1878년

무차별적으로 여자를 학살하는 남자들이 날뛰는 상황에서 주인공 앤과 그녀의 남편 앨런, 그리고 앨런의 친구 바니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서신을 교환하며 사태를 우려하고, 가족과 친구로서 서로를 걱정하며, 이러한 행위를 종교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아담의 자식들'에 대해 우려를 표합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사태를 호전시킬 어떠한 힘도 없었으며, 앤-앨런 부부 역시 비극적인 사태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게 됩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참담했던 대학살이나 마녀사냥도 이보다는 더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해서 멸망시키는 이야기들이야 많지만 <째째파리의 비법>은 '여성'이라는 문제를 정교하고도 비정한 방식으로 헤집고, 그 문제점들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킨 작품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상징과 비유, 은유들이 사용되고 있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거의 이해할 수 있는, 가슴이 아플 만큼 정교한 퍼즐이었습니다.

체체파리 tsetse flies 2
체체파리는 대개 1-3개월 정도 산다. 암컷 안에 있는 알에서 유충이 부화되며 이 유충은 어미의 자궁벽에 있는 한 쌍의 젓샘에서 분비되는 영양물질을 먹고 산다. 피를 충분히 먹지못한 암컷은 작고 덜 자라서 자기 힘으로 생존할 수 없는 유충을 낳게 된다.

사슬의 강도는 그 사슬의 가장 약한 고리의 강도와 같다.
ㅡ 늘 약한 고리에 대해 생각해 왔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에 있어 가장 약한 고리는 무엇일까요. 아써 케슬러의 지적처럼 '핵무기'가 이 세상을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이끌 수도 있을테고, 면역성을 확보하지 못할 질병, 인류 스스로 초래한 환경적 재앙이나 우리가 상상도 못할 파괴적인 힘을 가진 미지의 과학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라쿠나 셀던은 더욱 가능성이 높으며, 구체적이며, 본질을 궤뚫는 방식을 제대로 구현하였습니다.
암시적인 방식으로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을 뿐이지만 외계인의 인류 멸종작전이 전개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남자로 하여금 여자의 필요성을 부인하도록 하고, 여자를 몰살시킴으로써 획득될 수 있는 천국의 망상을 심어나가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단편을 여러번 읽으면서 생각한 것은 (이것이 실제 상황이라고 한다면) 그들 외계인들이 한 것이라곤 남자의 손에 무기창고의 열쇠를 쥐어준 것일 뿐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단지 그것만으로 남자들은 이 세상의 여자들을 모두 죽여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SF 소설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려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범지구적인 수준의 손상없이) 인류를 절멸시키는 방법으로 '여성을 없애는 작전'을 수행했다는 것 자체가 더 의미심장한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정체가 전혀 언급되지 않은 천사-외계인들은 북위 30도 부근의 지대를 따라 어떤 심리 공격법을 시행함으로써 인류를 (지구 자체의 손상 없이) 깨끗하게 몰살할 수 있었습니다. 지구의 나머지 지역들은 그들이 격발하고 인류의 절반(!)이 적극적으로 동참하면서 자동적인 도미노를 이룰 것임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어떤 남성들은 여성이 없이 어떻게 종족을 번식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했는데, 그런 사람들은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남성들이 지금과 같이 지저분한 동물적 번식 방법에 의존하는 한 하나님께서는 남성을 구원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남성이 여성이라는 자신의 동물적인 부분을 제거해 버리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대하던 신호가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종족을 번식시킬 수 있는 순결한 방식을 드러내 보여 주실 것이다.
ㅡ 블런트 시장(광적인 여성 살해 집단 "아담의 자식들"의 지도자)에 관한 윌라드 뮤스 상사의 증언에서

앤의 남편 앨런은 이 집단적인 광기로부터 사랑스런 아내와 딸을 지키기 위해서 집으로 돌아갈 결심을 합니다. 하지만 앨런은 힘겨운 귀향의 과정에서 똑같은 광기에 휩쓸리게 되지요. 
공항에서 이상한 망상의 순간을 경험하며 자신의 욕망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충격적인 방식으로 깨닫게 되는데 ,그것이야말로 여자들을 죽여대는 광기의 첫번째 단계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적인 욕망이 극단적인 지배욕구로서의 살인으로 대치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갑자기 그의 머리 속에서 무시무시한 자명종 소리가 울렸다. 그는 환상에서 깨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고개를 숙여 자시의 두 손을 내려다 보았다. 휴대용 칼을 손에 든 채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거지?

"이제 난 집에 가서는 안돼."
한순간 자신도 '아담의 자식들'과 다름없는 존재가 되었음을 직감한 그는 앤에게 돌아갈 수 없음을 알게 되지만 어쩔 수 없는 이끌림으로 자신의 딸과 몰래 만납니다. 결국 앨런은 그녀를 죽이고 자살합니다. 
나름대로 의식을 갖고 깨어 있고자 노력했지만 강력한 망상을 이길 수 있는 타개책은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왜냐면 약한 고리는 표면적인 의미에서 여성을 지칭함과 동시에 남성 속에 내재해 있는 것이었기에 미세한 자극에도 당연히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키는 것입니다. 아울러 그러한 자극에의 반응 자체가 바로 '약한 고리'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방법이라면 좋을 거예요. 우리가 째째파리에게 하듯이 하면 되는 거지요. 가장 약한 연결고리를 집어내고는 끝장낼 때까지 잠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요. 단지 몇 무더기의 뼈만 남는 거지요. 좋은 비료도 되구요.
바니, 이젠 안녕. 저는 보았어요. 거기 있었어요.
하지만 그건 진짜 천사가 아니었어요.
제 생각엔 부동산 중개업자였던 것 같아요.

이것은  이 단편의 끝부분인데 나는 이 대목이 특히나 인상깊었습니다. 결코 낙관은 아니지만 남편과 딸을 최악의 상황에서 잃어버린 채 자신의 목숨 마저 경각에 달린 현실 속에서도 유머와 풍자를 잃어버리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앤의 말을 따라 그 외계인들에 관해 이야기 하자면,
ㅡ 하지만 그건 진짜 천사가 아니었어요.
ㅡ 제 생각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페미니즘 학자였던 것 같아요.

체체파리 tsetse flies 3
(이 단편과 관련하여 이상한 희망을 주었던 백과사전의 내용)
체체파리를 박멸함에 있어 덫으로 잡는다거나 기생충을 이용한다거나, 가축에 살충제를 살포하는 등의 방법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잔류성 살충제의 공중 살포도 결정적인 결과를 얻지 못했다. 덧붙여 역사적으로 아프리카의 내륙에 있어 유럽인들에 의한 식민지화가 저지된 것은 활열병과 말라리아도 있었으나 체체파리에 의한 수면병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여러가지로 연민을 일으키는 단편이었습니다만 혼자 살아남은 앤이 자신의 죽음도 멀지 않았음을 예감하면서도 의연하게 생각하고 삶을 이어가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그녀의 죽음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자살했다고 하더라도 그녀로서는 최선의 투쟁이었다고 믿고 싶어집니다.
라쿠나 셀던은 지극히 냉철하고도 객관적인 측면에서 지구를 도탄에 빠트릴 수 있는 무기가 무엇인가를, 인류에게 있어서 가장 약한 고리는 무엇인가를 지적하여 우리가 지금껏 만들어 왔고 만들어낼 수 있는 재앙의 또다른 측면을 제대로 통찰한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흔히들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하며 우리는 그런 경우 또한 숱하게 보아왔습니다. 하지만 '앤' 같은 사람도 이 세상에는 분명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만이 이 암울한 단편의 종말이 보여주는 희망입니다. 
자신의 유서 같은 (바니에게 보내는) 서신에 의하면 그녀의 묘비명에는 이런 글이 있으리라고 합니다.
"지구에서 두번째로 비천한 영장류, 여기 잠들다."
(정말 사랑스런 여인입니다. 그녀의 이미지가 엘뤼아르의 시를 생각나게 했습니다.)

그녀는 언제나 눈을 뜨고 있다
그래서 잠 못 자게 한다
환한 빛 속의 그녀의 꿈은
태양을 증발케 하고
나를 웃게 하고 울게 하고 웃게 하고
공연히 떠들게 한다
ㅡ 사랑하는 여자, 엘뤼아르
 

1999. 10. JJ.Lee : 지구에서 가장 비천한 영장류 씀.
 

PS.
번역자는 '째째파리'라고 표기했는데 두 백과사전의 자료를 통해 확인한 바로는 '체체파리'가 맞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수많은 째째한 남자들의 '약한 고리'를 생각할 때 그들을 지칭하는 것으로는 아주 적합하리라 생각합니다.

PS2.
<째째파리의 비법>은 가학성/피학성, 주체성/수동성에 촛점을 맞춘 팻 머피의 <채소 마누라>가 가지는 상투적이고도 직접적인 문제제기(이 작품이 나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보다는 한층 격상된 작품이 아닐까 합니다. 비슷한 장르에서 이들에 전혀 반대되는 작품이라면 <피의 폭풍이 몰아칠 때>나 <채찍질당한 개들의 신음소리>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양들의 침묵>의 후속격인 <한니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소설에서 한니발 렉터에게 압도당한 클라리스 스탈링 수사관은 그와 결혼하여 우아하고도 엽기적인 삶을 이어갑니다. 한니발도 영화화된다고 하며, 렉터 박사역에는 여전히 안소니 홉킨스가 출연하기로 결정되었다는데 조디 포스터가 이 영화에의 출연 제의를 승낙할지 그 결과가 약간은 궁금합니다.)

PS3.
얼마전 꽤 유명한 "여류"시인(이분께는 "여류"라는 말을 꼭 붙여드리고 싶습니다.)이자 교수이신 K라는 분이 N과 M이라는 두 "여류"시인을 한국 페미니즘 문학의 미래라고 했다는데... 직간접적으로 이들 두 분을 조금 알고 있는 저로서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페미니스트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면 가능할련지... "째째파리의 비법"을 이 분들께 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