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레이 브래드버리의 글 읽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화성연대기>나 그의 단편집을 읽는다는 것은 늘 피곤한 일이었다. 그래서 몇몇 SF/환상소설집을 읽는 동안 그의 글은 늘 마지막에 읽곤 했다. 나는 그가 어떤 이야기를 할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고 늘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들곤 했다. 그의 느릿한 묘사 방식 때문인지 미묘한 감정의 흐름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번거롭게 생각을 해야 하고, 비슷비슷한 묘사를 인내심을 갖고 읽어나가야 하고, 그것을 게을리하면 맹숭맹숭 아무런 느낌도 없이 이야기는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마음을 아프게 만들고 짜증나게도 만들기 때문이며, 평문 속에 흐르는 미세한 감정을 따라 마음을 끊임없이 캐치해 나가는 것도 번거로운 일이다. 그리고 그 끝에는 늘 가슴 아픈 감상이나 미묘한 괴로움이 남아 있다.

"59 달러짜리 양복 한 벌로 여섯 사람이 동시에 행복해진다는 말을 지금까지 들어 본 일이 있나?"

양복점 주인 셤웨이의 말이다. 멋진 하얀 양복. 
멕시코계의 가난한 남자들이 한벌의 양복을 번갈아 입어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호세 마르티네스, 고메스, 바메노스, 빌리어너슬, 마누로, 도밍게스 등 무일푼의 여섯 사나이가 돈을 모아 산 한벌의 양복 ㅡ 바닐라 아이스크림 빛깔을 띤 그 멋진 하얀 양복을 입고 삼십분씩 꿈같이 아름다운 외출을 하는 것이다. 남루한 옷에 초라한 행색을 벗어던지고 (양복 한벌로) 최고의 신사가 되어 보무도 당당하게 거리와 술집을 활보하고 이전에 자신들을 무시하던 여인들의 눈빛이 달라짐을 즐기게 되는 것이다.
더이상 담배도 필요 없었고, 술도 필요하지 않았다. 여인의 키스도 필요 없었고, 그저 사람들이 자신을 멋쟁이로 바라보는 그 자체에서, 자신이 인생에서 처음으로 멋진 신사가 되었다는 점에서 무한한 행복을 느꼈다.
친구들이 하나 둘 화려한 외출을 시작하는 것을 바라보고, 또 돌아오는 멋진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맞이하는 것이다.
이건 명백한 사기, 내가 제일 싫어하는 더부룩한 헛소리들이다. 그렇지만 속고 싶었다.

바메노스의 차례에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는 이들 가난한 친구들 가운데서도 가장 문제가 많은 사람. 잘 씻지도 않고, 지저분한 수염을 길렀고, 밖에 나가면 그 멋진 하얀 양복을 더럽힐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이었다.
수없이 주의를 주고 억지로 목욕과 면도를 시켜 옷을 입혀 보냈건만 양복이 망가질까 노심초사하던 친구들의 우려대로 그는 외출하자마자 육중한 술집 여인을 무릎팍에 앉히기도 했고, 담배를 피웠고, 술을 마셨고, 음식접시를 앞에 두고 있었다. 
더이상 참지 못할 지경이 된 양복의 보호자들이 바메노스를 제지하는 와중에 한바탕 소란이 벌어지고 그는 부끄러움과 당혹감으로 도망가다 차에 치었다.
무릎뼈가 부서졌지만 그 순간에 제정신으로 돌아왔고 (이게 제정신인지...) 그가 쓰러진 채 걱정한 것은 오직 양복의 안위였다. 앰뷸런스 소리가 들릴 때 그가 다급하게 외쳐댄 것은 하얀 양복을 빨리 벗겨내라는 것이었다. 그가 앰뷸런스에 그토록 허둥댄 것은 혹시라도 의사가 자신을 급히 치료한답시고 가위로 바지를 도려낼까 노심초사했기 때문이었다.
기껏 그가 한 말이라곤...

자네들, 내가...... 병원에서 돌아오면...... 다시 한패에 넣어주겠지? 나를 내쫓지 않겠지? 나는 담배를 끊겠네. 몰리로의 카바레에도 가지 않고, 맹세코 여자도 가까이 하지 않겠어.

하지만 친구들은 마음으로 바메노스를 걱정하였고 양복을 걱정하였다. 마르티네스는 다정하게 바메노스를 위로하였고, 모두들에게 양복을 깨끗이 씻고, 보관하고, 다림질하는 방법을 이야기해주었다. 세상에 양복 한벌을 이처럼 사랑하며, 소중히 간직한 사람들이 또 있을까. 말하자면 이들은 '빈대떡 신사'의 주인공 같은 남루한 사람들인 셈인데 그들의 생각은 사뭇 다른 것이었다.

우리들이 부자가 되면 조금 서글퍼질 것 같아. 부자가 되면 모두 제각기 양복을 짓겠지. 오늘 밤 같은 날은 없을 거야. 친구들은 뿔뿔이 헤어지고 결코 지금처럼 되지는 않을 테니까.

행복이란 그런 것일까. 하얀 양복 한벌이 그들에게 꿈같은 시간을 주었다. 나는 이 단편에서의 행복에 관한 거짓말을 절반쯤 믿고, 그의 거짓말에 (나 자신을 포함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속을 수 있음을 좋아하고 또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멋진 하얀 양복. 어린 아이처럼 빨강, 노랑, 파랑... 이렇게 색깔을 떠올리다 보면 자꾸 이 단편의 제목이 멋진 '하양' 양복처럼 보이곤 했다.
멋진 하얀 양복은 없지만 나도 비슷한 마음으로 가끔 양복을 입는다.
아마 나는 마르티네스처럼 다정하고 침착하게 굴지 못하고 바메노스처럼 지저분하고 바보스러울지도 모르겠다. 물론 양복이 찢어질까 더 걱정하며 친구들이 나를 버릴까 걱정하겠지. 그래도 행복하겠다.

그들의 눈은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났고 보기만 해도 기분이 상쾌했다. 가까운 건물의 네온사인이 켜졌다가는 꺼지고 꺼졌다가는 켜지며, 그 멋있는 바닐라 아이스크림 같은 하얀 양복을 비추고 있었다.

하얀 양복을 입지 않은 마르티네스에게 셀리아라는 여자가 말했다. 그들이 한 벌의 하얀 양복을 돌아가며 입고 나온 것을 보았고, 마르티네스가 그 옷을 입은 멋진 모습도 보았지만 그녀의 눈에 가장 아름답게 보인 것은 그의 하얀 이였다고 한다.
 

1999. 11. 24. jjlee(c).
Midi : Spanish Lad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