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라리스는 바다로 이루어진 행성의 이름입니다. 하지만 이 바다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입니다. 솔라리스를 연구하는 학문 분야와 연구소, 방대한 장서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더욱 없을 것입니다. 왜냐면 솔라리스는 소설 속에 나오는 생명체적 존재로서의 행성 - 바다의 이름일 뿐이기 때문이지요.
스타니스와프 렘이라는 이름은 참으로 외우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늘상 그 이름을 생각해내려면 애를 먹습니다만 솔라리스라는 단어는 내 가슴에 그대로 새겨져 있습니다. ('아포크리파'라는 단어를 처음 본 것도 바로 이 소설에서였습니다.)
때로는 현학적이고, 때로는 감상적인 렘의 이야기는 혼미 속으로 빠져들지만 그 번민과 혼돈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상의 모든 과학자들 또한 진실로 솔라리스와 대화하고 그를 이해하길 원했습니다.
 

학계에서는 '솔라리스 사태'라는 말이 점점 '실패로 끝난 무익한 연구'의 대명사처럼 쓰이기 시작했다. 그런 경향은 우주 연구소의 학술 행정 담당자 사이에서 더욱 두드러졌고, 솔라리스 연구에 더 이상 예산을 낭비하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는 의견도 들려 왔다. 그러나 솔라리스 관측 스테이션을 완전히 폐기하자고는 주장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런 식으로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공식적인 화합에서 많은 과학자들이 '명예로운' 퇴진을 권고한 것도 사실이다.

솔라리스는 이중 태양의 주위를 도는 바다로 뒤덮인 행성입니다. 솔라리스계의 복잡한 궤도 운동 역시 솔라리스 자신의 미묘한 조정에 따라 유지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바다는 그 자체로 하나의 의식체이며, 어쩌면 생명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것 또한 우리 인간의 관점에서일뿐이며, 뭐라 정의하기 힘든 존재입니다. 그래서 솔라리스는 인식론적 한계를 넘어 불가지론의 영역에 있는 존재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솔라리스는 마치 인간을 이해하는 것처럼 연구소 직원들의 모든 의식, 심층심리, 추억과 고통을 읽어내고 그 이미지를 종합하여 피와 살을 가진 실체적인 존재를 만들어내어 돌려 보냅니다.(이 부분은 칼 세이건의 소설 컨택트와 매우 유사한데 아마도 컨택트가 솔라리스에서 '영감받은 것'이겠지요.)

주인공 켈빈 역시 솔라리스를 이해하고 연구하기 위하여 그곳으로 향한 심리학자이며, 소설의 주축은 솔라리스의 연구소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로 이루어집니다.
사건은 켈빈이 솔라리스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연이어 발생하는데, 그 주된 맥락은 솔라리스의 연구원들이 하나같이 편집광적인 행동을 보이는 것으로 흘러갑니다. 그들은 피해망상증 환자들처럼 켈빈을 경계하면서 만나려 하지도 않고, 알듯 모를듯한 이상한 이야기로 켈빈을 혼란케 합니다.
기바리안, 스노우, 사토리우스라는 세사람이 그곳에 있어야 했지만 기바리안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시체 곁에서 흑인 여자를 발견하기도 하고, 연구자들의 방에서 다른 목소리들을 듣기도 합니다.
진상은 이 즈음에서 조금씩 밝혀지는데 그곳의 연구자들이 하나같이 편집광이 되어버린 것은 바로 솔라리스가 보내온 '생명을 가진 과거의 기억들' 때문이었습니다. 이 무렵까지의 소설은 상당히 괴기적인 느낌 마저 들게 합니다. 
그리고 결국 켈빈에게도 사건은 일어납니다. 레야가 돌아온 것이지요. 그녀가 등장하면서 혼돈 속에 번민과 감상이 자리잡아 가는 셈입니다. 솔라리스의 의중은 더한 미로에 빠지고......
 

나는 그녀의 양 어깨와 꽉 끼는 옷 밑의 엉덩이, 그리고 침대다리 근처에서 건들거리는 그녀의 맨발을 관찰했다. 앞으로 몸을 구부리고 그녀의 발목을 잡은 뒤 발꿈치를 손으로 쓰다듬어 보았다. 발바닥의 피부는 마치 갓 태어난 갓난애의 그것처럼 부드러웠다.

자살한 옛 애인 레야가 생전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켈빈을 찾아옵니다.  하지만 결국 켈빈의 강한 거부로 인해 솔라리스에 의해 새롭게 창조된 이 '애인'은 괴로워합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이 솔라리스의 피조물임을 결코 알지 못한 채 자신을 거부하는 주인공을 원망하게 되기 때문이지요.(이런 부분은 필립 k. 딕의 정체성에 대한 집요한 추구를 연상케 합니다).
켈빈의 괴로움 역시 심각한 것이어서 그녀를 로킷으로 날려 버립니다만 레야는 또 다시 그에게 나타납니다. 다른 과거, 그러나 어쩌면 똑같은 번민을 안고 있는 스노우는 켈빈에게 사건의 진상을 결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만 신랄한 어조로 켈빈에게 과거로부터의 고통을 이야기합니다.
 

정상적인 인간이란, 도대체 정상적인 인간이란 어떤 것이지? 단 한번이라도 비열한 행위를 저지른 적이 없는 인간을 뜻하는 건가? 아마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설령 그것을 실행에 옮긴 적이 없더라도, 비열한 일을 상상한 적조차 없는 인간이 존재할까? 그것 또한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지. 그러나 10년이나 30년 전에 겪었던 정신적 갈등의 망령이 되살아난다면? 그런 갈등을 억압하고 망각하는 일은 어렵지 않지. 설사 그런 생각을 했다 하더라도 자기가 절대로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는 사실을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으니까 말야. 그런데 이 과거의 망상이 살과 피를 가진 사람의 모습을 하고 벌건 대낮에 느닷없이 나타난다면? 자기에게 달라붙어 절대로 떨어지지도 않고 죽일 수도 없는 것이라면? 그럴 경우 자네라면 어떻게 하겠나? 도대체 어디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나?

솔라리스의 레야는 켈빈의 냉랭함에서 받은 상처보다 더 심각한 괴로움에 빠지기 시작합니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자신이 레야가 아님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크리스 켈빈의 가슴 속에 남아 있는 레야는 오래전 지구에서 자살한 착하고 심약한 여인이었고, 도무지 인정할 수 없는 일이지만 자신은 어설픈 레야의 복제품이라는 것을 알고 괴로워 하는 것입니다. 어디서 만들어졌는지, 자신이 어떻게 존재하는지도 알 수 없지만 레야가 아님을 분명히 인식하면서 그녀는 고통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지요.
그녀의 슬픔, 그녀의 눈물은 '인간의 것'이 아님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녀는 내 시선을 피했고 내가 말을 걸어도 깊은 생각에 빠져들어 듣고 있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 문득 그녀가 고개를 들자 뺨이 축축하게 젖어 있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이지? 지금 울고 있잖아." "걱정 말아요. 이건 진짜 눈물이 아니니까요."

일부에서는 렘의 소설에 과학적인 묘사가 부족하다고 합니다. 사실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과학소설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과학적이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다른 시공의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인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러한 세계의 묘사에 있어서 상징적인 의미와 흐름을 즐겨 사용하며, 불가지론적인 입장으로 접근하는 있는 것일 뿐이겠지요.
하지만 이러한 모든 추상성과 특이한 상상력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어쩐지 비극적 연애소설처럼 느껴집니다. 지순한 옛 애인의 마음과 사랑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매우 난해한 전개를 보이면서도 매우 감상적이고, 읽는 사람의 마음을 쓰라리게 하지요. 그리곤 아무런 답도 주지 않은 채 번민에 빠져들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모로 가슴 아픈 부분이 많은 셈이지요. 또한 이 소설의 그로테스크하면서도 비극적인 로맨스는 소설의 이미지와 흐름에 빼어난 공헌을 하고 있어 더욱 애착이 가는 부분입니다.

솔라리스에 관한 어마어마한 분량의 연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마 전세기에 걸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기독교도들의 연구와 기록보다도 더 방대한 분량의 저작들이겠습니다만, 그것들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솔라리스가 무엇인지를 밝혀내지는 못했지요.
그야말로 '솔라리스에 대한 연구'는 불가지론에 관한 절망적인 기념비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솔라리스는 켈빈에게 레야를 보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상상하고, 연역하고, 추리하는 모든 것을 거부한 채 우리의 인식지점을 넘어선 어떤 의도(그것을 의도라 할 수 있다면)의 행위였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영원토록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은 (약간의 가능성 마저 부인한 것은 아닙니다만) 이미 죽은 사람을 보내오는 솔라리스의 의도가 무엇인지 짐작도 하지 못한 채 주인공을 비롯한 인간들은 솔라리스에 대한 이해나 교신, 또는 상호접촉에 실패합니다.
그리고 레야 또한 실패합니다.

스노우는 레야의 편지를 켈빈에게 전해주었습니다. 봉투는 봉해져 있었고 어린애처럼 커다랗고 삐뚤빼뚤한 글씨가 누구의 것인지는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아마도 1984년의 줄리아와 필체가 비슷한가 봅니다.)

"내 사랑. 그에게 부탁한 건 나예요. 그는 좋은 사람이에요. 당신에게 거짓말을 해서 마음이 괴로웠어요. 마지막으로 하나 소원이 있어요.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절대로 경솔한 행동은 하지 말아 주세요. 당신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람이었어요." 그 아래 글씨는 선으로 지워져 있었지만 나는 '레야'라고 씌인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솔라리스의 레야'가 죽기 직전에 쓴 편지입니다. 켈빈의 옛 애인은 자살했었고, 솔라리스가 만들어낸 또다른 레야 역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였지요. 다른 장소에서의 똑같은 행위. 
그게 그녀의 길인 것이었을까요? 그녀의 운명이거나 그녀의 유전자에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필연의 선택이었을까요? 
유서에서조차 레야라고 썼다 그어버린 행위는 레야이면서 레야가 아닌 그녀의 괴로움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장소에서의 똑같은 행위...... 반복되는 악몽처럼 켈빈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나 봅니다.
소설 속에선 언급이 없지만 기바리안은 아마도 '자신의 과거'를 죽이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자신을 없애는 결단을 내린 것 같습니다. 또한 비슷한, 그러나 정반대의 이유로 레야는 스노우를 통하여 간접적인 자살을 한 것이겠지요. 그녀는 과거를 살릴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세번 가량 솔라리스를 읽었습니다만, 나는 솔라리스가 무얼 주장하는 것인지 잘 알 수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평자들은 솔라리스를 가리켜 '존재론적 sf'라고 합니다. 거기 반대할만한 논리를 나는 갖추지 못했습니다만 그렇게 규정할만큼 소설의 흐름이 명백하지는 않아 보였습니다. 
적어도 내게는 솔라리스가 매우 다층적인 메시지를 갖고 있는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마치 1984년이 정치소설이면서, 쓰라린 사랑을 보여주고, 언어학적 통제와 부정적인 미래관을 보여주는 것처럼 렘 또한 자신의 다양한 감정과 입장들을 소설 속에 담지 않았나 싶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외계 생명에 관한 불가지론적 상상력을 펼치는 듯 합니다만 레야라는 그림자적 존재를 통하여 정체성의 문제를 강하게 시사합니다. 정체성 상실의 비극이지요. 
정체성에 관한 집요한 추적과 통찰을 보여준 필립 k. 딕이 매우 절묘한 수미쌍관의 전개와 기발한 상황설정으로 정체성 상실의 극적인 일면을 보여준다면 렘의 소설은 그와는 달리 매우 감상적인 흐름 속에서 어딘가 심오함이 깃들어 있는 인상을 줍니다. 그 심오함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하여서는 언급할 자신이 없습니다만 앞서 언급한 평자들의 말처럼 존재론적, 또는 인식론적 접근방식에 실린 슬픈 사랑의 이야기이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이 소설은 1971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하는데 전혀 접할 기회를 갖지는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이곳에서 계속 지내야 하는 것일까? 나와 그녀의 손길이 닿은 물건에 둘러싸여서, 그녀가 호흡했던 공기 속에서? 무엇 때문에? 그녀가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으로? 나는 아무런 희망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내부에서는 하나의 기대가 싹트고 있었다. 그녀가 간 뒤에 내게 주어진 단 하나의 희망이었다. 어떤 성취가, 어떤 조롱이, 또는 어떤 고뇌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나는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아직 과거의 경이로운 기적의 시대가 영원히 과거의 것이 되어 버리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다.

소설은 이렇게 켈빈의 독백같은 묘사로 끝을 맺습니다. 그리고 켈빈과 같이 나 또한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또다시 솔라리스와의 대화를 시작합니다.
솔라리스는 어쩌면 <고해 苦海>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어쩌면 힘겨운 과거와 자의식에 대한 <고해 告解>인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 모두가 합당하며, 그 모두가 무의미한 해답이 될 것입니다. 결국은 구체적인 정체성과 자기성찰이 필요한 순간이겠지요. 켈빈은 그 고통의 바다를 헤아리려는 수도승 같아 보였습니다.

나는 간혹 솔라리스라는 바다의 꿈을 꿉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누구를 만날 것인가, 무엇을 만날 것인가를 상상하며 고통과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솔라리스는 터무니없게도 아누비스의 저울처럼 자신의 무게와 내 심장의 무게, 그리고 깃털의 무게를 등가시키려 합니다.
 

1998. 11. 5.

PS.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소설 만큼은 결코 아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