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된 사나이는 어쩌면 두 사람의 주인공이 존재하는 소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막강한 부와 권력, 그리고 사악함과 매력, 욕망과 악몽을 함께 지닌 모나크 그룹의 총수 벤 라이히와 현명하고 사려깊고 인정많은 1급 에스퍼(extra sensory perception-er ; 소설 속에서는 대개 독심과 텔레파시 능력자의 의미로 사용됨) 경찰관 링컨 파웰 총경이 그들입니다.
이 소설을 읽고 있는 동안 나의 머리는 어지러웠습니다. 얼굴없는 사나이는 누구일까? 벤 라이히는 어떻게 될까? 바바라 드 코트니는 어떻게 될까.....
게다가 에스퍼들의 대화와 벤 라이히의 심적 독백들이 그대로 묘사됨으로 인하여 대단히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다 읽고 난 뒤에 되돌아보면 소설의 플롯은 그 대단한 산만성과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매우 단순한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번역자의 작위적인 변조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소설은 여러 면에서 위트가 넘치고, 시대를 앞선 놀라운 감각이 있습니다. 이 작품이 1953년에 발표된 것이라는 점은 내게 있어 대단히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에스퍼들의 대화나 벤 라이히가 사용하는 에스퍼 독심 방지용 차폐 음악, 중고딕으로 표현되는 에스퍼들간의 대화나 일반적인 책의 활자보다 큰 태고딕(굵은고딕)으로 표현되는 분노와 확신, 그리고 라이히의 악몽에 등장하는 상징들이나 그의 심적 독백들은 초현실주의 시같은 분위기를 풍기면서 복선 이상의 큰 의미를 가지며, 큰 틀을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벤 라이히는 라이벌 재벌 드 코트니 그룹에게 밀리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합병을 제안하지만 그것이 거부되자 자신의 분노를 제어하지 못한 채 드 코트니를 죽여 자신의 야심을 이룩하려 합니다.
그 첫번째 단계로서 최고 수준의 독심과 텔레파시 능력을 가진 1급 에스퍼 거스 테이트를 포섭하여 자신의 'g2'가 되게 합니다. 그리고 라이히에게 이용당하고 에스퍼 길드에서 제명당한 채 폐인이 되어버린 제리 처빌을 다시 불러들이고, 키노 퀴자드도 끌어들입니다. 라이히를 좋아하는 두 여인으로는 매력적이지만 좀 멍청한 더피 와이갠드와 마리아 보몬트가 있으며, 보몬트의 집에서 이루어지는 파티에서 드 코트니를 죽이게 됩니다. 그것은 파괴의 시작이었습니다.

등장인물들의 이름에 관한 변조는 이 소설의 재미있는 부분 가운데 하나로서 더피 와이그&(더피 와이갠드), 조 1/4메인(조 쿼터메인 ; 이 이름에 대한 설명은 찾을 수가 없었지만 아마도 1/4은 '쿼터'인가 봅니다.), 새뮤얼 @킨즈(새뮤얼 애트킨즈), 금박 입힌 시체(마리아 보몬트 ; 그녀는 24세기 첨단 의술에 의한 '성형미인'입니다.) 등이 그것입니다.
더피 와이그&가 '머리가 약간 돈 수학자가 등장하는 뮤지컬'을 위해 만들었다는 tenser, said the tensor도 재미있었습니다. 에스퍼가 아니며, 에스퍼를 대단히 혐오하는 벤 라이히는 이 노래를 자신의 의식-무의식에 집중적으로 '입력'시켜 에스퍼들로부터의 마음읽기를 방해하는 차폐막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이 소설의 흐름으로 본다면 '파괴를 위한 카운트 다운'이라는 제목이 더 어울릴 노래일 것입니다.

8입니다, 7입니다,
6입니다, 5입니다,
4입니다, 3입니다,
2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팽팽하게, 하고 텐서는 말했습니다.
더 팽팽하게, 하고 텐서는 말했습니다.
긴장, 불안,
그리고 알력이 시작되었습니다.

특히나 마지막 부분의 "긴장, 불안, 그리고 알력이 시작되었습니다"는 라이히의 심리 상태를 표현하는데 즐겨 사용되면서 그 소설적 효과를 높여 나가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초현실주의 시처럼 끊긴 채 배열된 에스퍼들의 대화 또한 이 소설의 매력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벤 라이히라는 캐릭터를 좋아했습니다. 그는 나의 시에서처럼 '악당의 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결코 이길 수 없는 전쟁에 뛰어든 셈입니다. 그 전쟁은 '정어리 게임'을 통한 기회 포착과 함께 '물 탄환'으로 드 코트니를 살해함으로서 시작됩니다.
드 코트니가 송신한 wwhg는 수락을 의미하는 암호문이었지만 라이히는 그것을 무의식중에 '제안 거부'로 이해하였고, 결국은 드 코트니를 살해함으로써 파괴의 길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나중에 밝혀지게 되지만 드 코트니는 바로 라이히의 아버지였으며, 바바라 드 코트니는 그의 자매였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죄의식이 그를 파괴로 이끌어가는 구도이지요. 아마도 그러한 그의 엉성한 자기조직성과 대비되는 집요한 자기파괴성이 그의 캐릭터를 매력적인 것으로 만들어가는 것 같습니다.(자신의 범죄를 완전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바바라 드 코트니의 살해가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는데, 그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이 소설에서 불만스러운게 있었다면 그 싸움은 애초부터 결과가 뻔한 것이었음에도 벤 라이히의 위협과 광포함이 전 우주적인 것으로 과대평가되면서 '선한 자들'과 불균형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나는 그것을 영화 양들의 침묵에서 조디 포스터 + 그의 예리한 상관 + 앤쏘니 홉킨스와 버팔로 빌의 싸움 같은 불균형으로 생각합니다.)
라이히에게는 단 한명의 1급 에스퍼 거스 테이트(벤 라이히가 지원하는 에스퍼 애국 연맹 소속 - 이들은 우익 에스퍼 단체라고 이해해도 될 것 같습니다)의 도움이 있을 뿐이었고, 몇몇 조연들 ; 키노 퀴자드, 제리 처빌과 어리숙한 경찰국장이 어설프게 그를 거들고 있을 뿐이지만, 링컨 파웰(그의 별명은 link입니다)은 그 자신이 1급 에스퍼임과 동시에 에스퍼 길드의 존경받는 지도자였고, 경찰서장이었고, 그의 배후에는 수많은 에스퍼들과 현명한 조언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거기에다 매력적인 메리 노이스의 일편단심 사랑이 있고, 바바라 드 코트니 마저 그의 곁으로 갑니다.(이런 점에서 나 자신이 마치 벤 라이히라도 된 것처럼 링컨 파웰에게 적의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라이히는 작은 곳에서 승리할 뿐, 대세는 언제나 패배에 있었고, 그 패배는 애초에 드 코트니를 살해하는 순간 기정사실화 되어 있었습니다. 파괴된 사나이를 읽는 동안 내내 못마땅한 것은 바로 그 점이었습니다.

링컨 파웰은 동화속의 왕자이며, 바바라 드 코트니는 아리따운 공주였습니다. 그리고 벤 라이히를 제외한 (어쩌면 그 까지도 포함하여) 나머지는 모두 악역이거나 (결코 유명하지 못한) 까메오 같은 존재들일 뿐이었지요. 작가 베스터는 바바라 코트니가 잠재적 에스퍼인 것으로 끼워 맞추어가면서까지 링컨 파웰과 그녀를 이어주려 하고 있었습니다.(에스퍼 길드의 법령에 의하면, 에스퍼는 에스퍼와 결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메리 노이스는 에스퍼였습니다만, 아마 그녀는 링컨 파웰에게 있어서 '노이즈'였나 봅니다. 그들의 link를 방해하는...)
그러한 점에서 나는 이 소설에 관한 한 내내 악당들과 몰리는 자의 편이 되고 싶었습니다.
벤 라이히, 거스 테이트, 그리고 라이히와의 만남으로 파멸한 사람들, 링컨 파웰의 사랑을 얻지 못한 메리 노이스 등등이 내게 그러한 느낌을 불러 일으켰습니다.(벤 라이히를 파괴시킨 것은 자신의 욕망과 더불어, 자신의 양심의 가책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결국 라이히는 에스퍼들의 총체적 능력에 링컨 파웰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실행한 집단 카덱시스(물론 전송자는 링컨 파웰이고 악몽의 수신자는 벤 라이히입니다)에 의해 그 죄상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파괴의 형에 처해집니다.(이 소설의 대부분에서 시사하는 파괴의 의미와는 달리 법률적인 '파괴의 형벌'은 그의 잘못된 정신을 제거하고 새로운 사람으로 만드는 과정이며, 그것은 대단한 고통을 수반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결국 라이히가 꿈꾸던 세상은 링컨 파웰의 것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는 대단히 양심적이고 선하고 온화한 방식으로 그것을 얻었지만, 그게 반드시 설득력을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 씁쓸한 뒷맛이 있었습니다.
라이히 마저도 파괴의 와중에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파웰, 친구, 파웰..."이라고 이야기 하며, 바바라 코트니가 파웰과의 사랑에 빠지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습니다.

파괴된 사나이는 전체의 줄거리에서 보다는 그 전개 과정과 흐름에서 대단한 매력을 가진 소설이었습니다. 벤 라이히의 악몽과 얼굴없는 사나이의 이미지 같은 상징들은 추리소설적인 전개를 통하여 이 소설에 몰입하게끔 하는 매력적인 요소들이었습니다.
나는 파괴형을 치루고 있는 벤 라이히처럼 파웰을 친구로 생각하고자 노력하면서, 킹스턴 병원에 갇힌 채 치유의 꿈을 꾸며 책을 닫습니다.
그 꿈, 그 꿈의 노래는......

다음은AlfredWorster의창조된사나이에등장하는
"조금은마음이따뜻한해부학자를위한뮤지컬"의노랫말입니다
이것은6/8박자의느린노래입니다
Tenser,saidtheTensor를두번부르는동안이노래는
한번만부르면적어도무
승부입니다.

Yes, said the "yeser".

시작이 1/2입니다. 
6입니다. 7입니다. 
8입니다. 9입니다.
그리고 무한히!
긍정적으로, 예스맨이 말했습니다.
긍정적으로, 예스맨이 말했습니다.
이완, 평안,
그리고 이해가 시작되었습니다.
 

19990201
 

ps.
놀랍게도 이 책 표지에는 원저자의 이름이 잘못되어 있는 치명적인 실수가 있었습니다. 파괴된 사나이 폴 앤더슨 지음 -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저자는 당연히 알프레드 베스터입니다. tenser, said the tensor의 '전파방해'에 현혹되었나 봅니다.

ps2. 
베스터의 작품 가운데 내가 읽은 것은 <타이거 타이거>와 <파괴된 사나이>입니다. 대체로 베스터 최고의 작품이라고 알려진 두 소설이지요. 타이거 타이거는 오래전에 읽어서인지 기억이 희미합니다만, <모하메트를 죽인 사람들>이라는 단편은 나름대로 재미있고 기발한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