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어딘지 비 내리지 않아 
정든 잡음 대신 음악만 듣고 있습니다. 
늘 그 이름이 궁금했었는데 '마니차'였습니다. 
손바닥만한 것에서 몸을 가누기 힘든 것까지 
어지러이 돌아가는 마음 안쪽에는 
어떠한 글귀도 들어 있지 않습니다. 
언제나 손길이 닿아 거기 읽을거리가...
ㅡ 2001. 6. 30. 이작자

오늘 아침, 주말판 신문의 책소개 섹션을 읽다 "시베리아 수용소 탈출... 자유찾아 7000㎞"라는 머릿글을 보았다. 그 문장이 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나는 그게 어느 책에 관한 이야기인지 금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이름 ㅡ 슬라보미르 라위츠를 겨우 떠올렸다. <얼어붙은 눈물>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나왔으나 틀림없는 그 책이었다.
내가 죠지 오웰과 그레엄 그린을 열심히 뒤적이던 시절, 바로 그때 읽었던 조금 다른 의미의 책 가운데 하나가 바로 "길은 멀어도"였다. 나는 이 책이 다시 발행될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어 90년대 후반에 타이핑 작업을 했고, 지금은 파일로 그 책을 보관하고 있다면 이 책에 관한 각별한 느낌을 대신할 수 있을지... 
약간은 설레이는 마음으로 컴퓨터의 디렉터리를 뒤져서 타이핑한 파일을 찾았고, 표지가 달아나버린 낡디 낡은 책도 손에 쥐고 있다.

The Long Walk ㅡ A Gamble for Life 
by Slavomir Rawicz(as told to Ronald Downing)

책 말미에 보니 1967년에 여음사, 역자는 원응서로 되어 있다. 가격은 380원. 아주 구식의 외래어 표기가 가득한 시베리아 죄수들의 탈출기일 뿐인데도 나는 이 책을 읽고 또 읽곤 했다. 모스크바에서 시베리아 수용소에 도착한  죄수들 가운데 일곱명과  한 소녀가 바이칼 호를 지나 고비사막을 건너고 몽고와 티벳을 거쳐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까지 이르는 탈출기 ㅡ 하지만 수용소의 소장 부인이 탈출을 도왔다는 대목 이외에는 그다지 극적인 내용도 없는 이 책이 준 싸한 느낌을 어찌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엉뚱하게도 그 느낌이란 것은 영화 <빠삐용>에서 드가가 탈출을 포기하고 바람부는 언덕에서 죄수복 펄럭이며 비틀비틀 돌아서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기분 같은 것이었다.

탈출경로도 (초선이네 창고에서 가져옴)

이들이 겪은 혹독한 고초 때문만은 아니다. 끝끝내 자유를 찾은 '인간승리'의 이야기인데도 이 책의 많은 부분엔 설명하기 힘든 묘한 슬픔이 어리어 있다. "삶에의 의지"의 혹독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몽고와 티벳 사람들의 인정어린 모습이며, 라사를 향한 맹목적 행로, 굶주림과 추위에 떨던 히말라야 산맥에서의 의외의 도움의 손길이며 인도에 도착한 이후의 정신적 공황... 이 모든 것들이 뭉뚱거려져 삶의 형상을 인상적인 것으로 만들어낸다. 몽고와 티벳의 문화와 생활에 관한 가식없는 묘사 또한 이 책의 감추어진 보석들이다.
지금은 티벳의 '라사'라는 지명이 우리에게도 꽤 알려진 이름이 되었다. 동양의 신비가 결집된 장소로서 그 도시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 있어 '라사'라는 도시는 늘 '안식과 희망'을 생각나게 하는 빛나는 이름의 도시였다. <길은 멀어도>는 처음으로 그 도시의 이름을 내게 전해준 책이다. 나는 지금도 내가 알고 있는 그 라사를 그리곤 한다.

천천히 러시아 말로 "우리들은 라사로 간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 노인은 갑자기 눈이 빛나며 무엇인가 알아채린 눈치를 했다. "라사, 라사" 하며 스미스씨는 다시 되풀이했다. 그리곤 남쪽을 가리켰다. 노인은 오랫동안 지니고 다닌 것같이 보이는 회전예배기(回轉禮拜器)를 외투 속에서 끄집어 냈다. 그 양피지(羊皮紙)에는 어딘가 좋고 냄새가 나는 기호(記號)가 그려져 있는데 그것은 오래되어 언저리가 약간 해져 있었다. 그는 태양을 가리키며 팔을 벌리고는 원(圓)을 그었다.

나는 그 '회전예배기'가 무엇인지 어떤 것인지에 관해 홀로 상상하며 오래도록 궁금해 하였다. 책을 처음 읽은지 십수년이 지난 다음에야 그것들을 보았고 어느 책에선가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길은 멀어도>에 심심찮게 등장했던 그 회전예배기는 바로 '마니차'라는 것이었다.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십수년씩 형을 살았던 사람이나 고비사막에서 눈 감은 이나 자유를 찾은 네 사람이나 지금쯤은 모두 이 세상에 없으리란 생각을 하면 참 이상한 기분이 되곤 한다. 이 책의 덤덤한 마지막 장면도 내내 그런 기분을 내게 주었다. 고비사막에서 밤새 걷고 또 걸었으나 제자리를 빙빙 맴돌았던 것 같은 허망함,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은 대체 어디 있는 것일까.
내가 생각하고 기억하는 한, 그런 자유가 있는 한 고비사막에서 쓰러지던 크리스티나의 모습과 라사에의 꿈을 잊지 않을 것이다.

그는 나와 같이 칼카타로 가는 버스를 탔다. 스미스씨는 칼카타에서 내리며, "몸조심 하세요. 슬라브. 그리고 축복이 내리기 바랍니다.…" 했다.
버스는 수송 부대를 향해 달리었다. 이 수송 부대에서 나는 중동 지구로 떠나는 수송선(輸送船)을 기다려야 했다. 다시 한번 스미스씨를 돌아보았다. 그는 손을 흔들며 서 있었다.
문득 모든 인간의 고독을 혼자서 짊어진 사람처럼 나는 친구를 잃고 모든 것을 잃었다는 허전한 마음을 어쩔 수가 없었다.
 

2003. 4. 5. JJ.Lee ⓒ

*이 책이 출판된 것은 로날드 다우닝이 고비사막의 설인에 관해 취재하던 와중에 영국에 사는 폴란드인이 설인을 목격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라위쯔를 만나면서였다고 한다. 실제로 설인과의 조우가 책의 후반부에 등장하며 이것이 간접적인 계기가 되어 한 사람이 죽음을 맞기도 한다.
*이 링크는 이 책에 관해 예전에 "경비실"에서 언급했던 내용이다.
*최근 새로이 발행된 책 : 얼어붙은 눈물, 슬라보미르 라비치, 지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