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은 대개 비슷하다. 일요일의 교회를 위해 잠시 "성서로운 일"을 하고 이런저런 "잡일"을 하면 대충 마치는 셈인데 오늘은 그 나머지 시간을 내내 약 만드는데 바쳤다. 알록달록한 저마다의 빛깔을 지닌 알약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기분이 좋았다.
그 결과 공정의 60퍼센트 가량 진척이 있었고 내일은 그것을 마저 완성하고 포장 작업을 할 예정이다. 포장의 도안은 시중의 약병들과는 좀 다르게 샤갈의 어떤 그림을 흑백 스케치 스타일로 바꾼 것이다. 약 만드는 와중에도 잠깐 잠깐씩 스스로 약에 취하여 나는 행복하였다. 作者는 아니지만 製作者도 행복할 수 있는 묘약이어서 진심으로 기쁘다. 꼬깃꼬깃 접혀 있는 얇은 종이를 펼치면 아래와 같은 글이 짙은 회색빛의 잔글씨로 빼곡히 적혀 있다.

■ 용법 용량
   성인 1회 1∼3정, 오후 쉬는 시간 또는 취침전
   복용 후에는 반드시 약의 효능에 대한 믿음을 가지시오.

■ 저장방법
   머리맡, 또는 머리속. 잠자리, 또는 흉부속.
   (black or heart-shaped box)

※ 사용상 주의 사항
   유사품에 주의하고 약병을 절대 약장에 세워두지 마시오!

<약 좋다고 남용말고 약모르고 오용말자.>

미이라 가루라든가 또는 맨드레이크 루츠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심지어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비이커나 그럴듯한 주문도 없이 나는 그저 초록불 들어오는 스위치를 켜며 일을 시작하였다.
내가 유리 다기와 끓는 물을 사용한 것은 오직 쉬엄쉬엄 차를 만들어 마시기 위함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일임에도 재료를 준비하고 정제하고 본격적인 제조에 들어가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였다. 어느 여름날이었다.

지난 겨울 이후 아무도 찾는 이 없어 세월에 절어 놀고 있던 16절 백상지(195X268, 80g)는 조금 노릇한 빛깔을 띠고 있었다. 어느 무더웠던 여름날 그것들을 전부 잘라 B5(182X257)로 만듦으로써 나는 기본적인 재료를 준비한 셈이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멜랑콜리의 묘약을 만들기 시작했다. 어느 재료, 심지어는 지시문에까지 손길 닿지 않은 곳이 없는 것, 부디 이 약을 복용하는 이들에게도 비슷한 효험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불순물 제거에도 꽤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복사기가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한알 한알 약이 쏟아져 나왔다.

일단 스무병을 만들어 그 약이 급하거나 효력을 발휘할 법한 (미스터.리를 포함하여) 미련 많고 미련스런 환자들에게 먼저 나눠줄 생각이다. 언젠가의 효과 검증을 위하여 각 병마다 고유의 번호를 붙일 예정이며 미스터.리 인슈어런스 가입자가 먼저 혜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비아그라, 제니칼, 프로페시아로 지칭되는 해피 메이커는 분명 아니지만 이 오래되고도 새로운 약이 멜랑콜리에 특효가 있음을 나는 분명히 알고 있다. 약 좋다고 남용말고 약모르고 오용말자 ― 하지만 우울한 어느 하루를 위하여 마음껏 유용하고 실컷 남용하기를 나는 바란다. 완벽한 자동화 시스템을 갖춘 공장 생산품과는 한참 다른 조악한 모양새이지만 직접 달이고 정제한 이 약이 그것을 복용하는 이의 마음을 더욱 달일 것이라는 것을 틀림없이 믿는다. 아무리 삼키어도 결코 줄어들지 않는 멜랑콜리를 향한 기적!
 
 

2003. 8. 30. JJ.Lee ⓒ
오늘, "멜랑콜리의 묘약" 제조에 들어감을 기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