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왕국에서 지도술은 너무도 완벽한 수준에 이르러 한 도의 지도는 한 시 전체를 담고 있었고, 한 왕국의 지도는 한 도 전체를 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거대한 지도들조차 만족감을 주지 못했고, 지도학교들은 왕국과 똑같은 크기에 완전히 왕국과 일치하는 왕국지도 하나를 만들었다. 지도 연구에 덜 중독되어 있던 다음 세대들은 그 널따란 지도가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고, 약간은 불경스럽게도 그 지도를 태양과 겨울의 자비에 내맡겨버렸다. 동물과 거지들이 득실거리고 있는 지도의 폐허들은 남서부의 사막에서 허물어져 가고 있다. 나라 전체에 그것 외에 지도술과 관련한 다른 유물들은 없다.
ㅡ "과학에 대한 열정" 전문 / <칼잡이들의 이야기>, J.L.B.

단순하게 현학취미(이럴 때는 '현악취미'라고 해야 더 맞을지 모르겠다)라고 물리쳐버리기에 그의 세계는 너무나 독특하면서도 나름의 방식으로 평이성을 유지하고 있다. 
숱한 세월을 도서관장으로 재직하며 수없이 많은 책을 삼켜버린 그의 눈. 하지만 그 대단한 지적 광휘에 휘둘리어 그의 상상력을 도외시한다는 것은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다. 수많은 인용의 출처를 밝히고 주석을 달아 그의 영토를 파악하려 드는 것은 <과학에 대한 열정>에 나오는 지도의 우화 같은 행위가 될지도 모르겠다. 프리초프 카프라가 말한 지도와 영토의 착각으로서의 '마야' 같은 것.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의 경우도 비슷하여 벌거숭이 임금님의 비유처럼 변화없는 형상에 새로운 속성을 부여하는 흥미진진한 시도를 한다. 이 단편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소감은 비생산적인 학술논쟁에 대한 조소처럼도 보인다.
그리하여 인용과 주해는 (그의 그럴 듯한 엉터리 주석 같은 '증거'를 통해 ) 똑같은 작품과 그 내용의 일부를 전혀 다른 것, 심지어는 상반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나는 그의 영토의 심장부에, 혹은 그의 세계의 발끝에, 혹은 그의 발자국의 요철에 아주 작은 흔적처럼 나의 상상을 덧붙이고 싶다. 어쩌면 나는 그가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 입구 오른쪽 지하의 습한 장소에 숨겨두고 잊으려 애썼다는 <모래의 책>의 하찮은 한 페이지가 될지도 모르겠다. <1983년 8월 25일>의 기술에서처럼 밖에서는 또다른 꿈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위대한 상상의 칼잡이가 만들어내는 세계 ㅡ "인용과 주해"로 찾아가기에는 너무도 험난한 길일 것이다.

새로 난 산길이 
뭘 알아보겠다는 듯 서둘러 
온통 지는 해로 뒤덮인 숲 사이로 
두리번거리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흘러간다 
ㅡ 인용과 주해, 이창기
 
 

2003. 9. 25. JJ.Le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