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한다는 것은 종차를 잊어버리는 것이며 
일반화하고 추상화한다는 것이다.
― <기억의 명수 푸네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불면증에 관한 은유가 담기어 있다는 <기억의 명수 푸네스>에서 보르헤스는 하루를 기억하는데는 꼬박 하루가 걸린다고 하였다. 참으로 무미건조한 언명이지만 또한 반론의 여지가 없이 정확한 말이기도 하다.
어느날 나는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의 일생을 펼쳐놓은 듯한 사진 164장을 한꺼번에 보게 되었다. 60여년에 걸친 어떤 이의 삶의 편린들이 어느 한산한 하루에 내 앞에 펼쳐진 것이다. 그의 목소리보다도, 그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할 이국의 언어로 이루어진 시보다도, 그 사진들에 넋이 빠져 나는 어느 일요일 아침을 다 보내었던 것이다.(나는 그의 시의 제목에 나오는 '빠이쇼'라는 단어가 정열 혹은 수난을 의미한다는 것을 아는 것만도 기뻤다.)
의자에 앉아 있는 두 살 짜리 꼬마의 사진에서부터 삶의 마지막 순간에까지 서글서글한 그 눈매와 격의없는 웃음을 바라보며 마음은 이상한 연민으로 채워지곤 하였다. 외교관과 시인, 극작가이자 영화평론가, 그리고 보싸노바 작곡자이자 가수로서의 그의 삶의 여러 면면들을 한껏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한 낭만적인 정신의 개인사에 국한되지 않고 그가 속한 시대들, 나 자신도 공유하였던 그시간들의 상징처럼 보였다.
"단 한 번밖에 본 적이 없지만 스페인식으로 장정된 책의 들쑥날쑥한 결과 께브라초 반란 전야에 리오 네그로 강에서 어떤 노가 일으켰던 물거품의 모양을 그의 기억 속에서 비교할 수 있었다"던 푸네스였으면 어찌 하였을까. 그 164장의 사진들로 그의 삶을 활동사진처럼 구성하였을까. 그의 연보에 그 사진들을 결합시켜 그 삶의 궤적을 그릴 수 있었을까.
하지만 잊어버리는 것은 잊어버리는 것, 잃어버리는 것은 잃어버리는 것이며 그것의 어떤 지점 이상은 불가항력적인 것이다.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자기 합리화라고 하여도 상관없다. 어쩌면 이 우주 자체가 푸네스처럼 완벽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란 그런 기록의 집적 그 자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무한의 공간에 펼쳐진 팰림프세스트. 하지만 나는 다만 기억과 영속을 동일한 것으로 생각지 않아야 마음이 편안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
옛시절의 사진들은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한다. 나는 가능한대로 그 표정이며 그 모든 시절의 모습들을 마음속에 담으려 애를 썼다. 하지만 정말 그리운 것을 사진 속에서 본 적은 없다. 결국 동어반복이 되고 말겠지만, 어떤 하찮은 인생의 하루조차도 활동사진과는 비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내 어릴 적의 추억이 담긴 딸기밭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늠하는 것과도 비슷한 일, 푸네스의 이야기에서처럼 미심쩍은 부분은 한 군데도 없었으나 하루를 재구성하는 데 꼬박 하루가 걸릴 뿐이다. <1984년>에서 윈스턴 스미스가 잠시 바라보다 기억통으로 던져버린 한 장의 사진처럼 그것이 불확실한 것이기에 때로는 어느 한 순간의 재현에 그 자체에 비할 수 없는 많은 시간이 소모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내 마음에 관한 배반은 아닐 것이다.
 
 

2003. 11. 9. JJ.Le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