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구들"에서 끝날 줄 알았던 보르헤스 읽기. 하지만 몇해 전엔가 모 출판사에서 나온 보르헤스 전집이 손에 들어온 이후로는 틈만 나면 또 그것들을 펼쳐보곤 하였다. 가게에서 한가로울 때나, 늦은 저녁의 컴퓨터 앞에서나 잠자리에서, 서울 부산을 오가는 기차 속에서 그리고 화장실에서까지 그 책들은 내 손을 떠나지 않았고 때로는 꿈에서도 그러하였다. 이 전집 자체가 모래의 책처럼 날마다 내게 새로운 세상의 편린들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책들을 읽는 내내 나는 의심스런 문장을 꽤 많이 발견하곤 하였다. 매끄럽지 못한 번역체 문장에 맞춤법의 오류까지 눈에 띄어 책의 신뢰도를 떨어트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번역한 보르헤스의 작품들과 더불어 서로 비교해 보면 그것은 더욱 확연하다. 무엇보다도 곤란했던 점은 누가 옳고 그르다 말할 것도 없이 일단은 너무 많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렵다고들 하는 보르헤스 읽기에 또다른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것이다.
(언젠가 여유 있을 때 그 다른 문장들의 예만 모아서 정리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한다.)

틀뢴에서는 사물들이 복제되며,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잊어버리면 그것은 스스로 지워져 버리거나 세부 항목들을 상실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거지가 그곳을 방문하는 동안에는 아주 오랫동안 생존했는데 그가 죽자 사라져버린 문지방이 그것의 한 고전적인 예이다. 때때로 몇 마리의 새들이나 말 한 마리가 원형극장의 유물들을 구원하기도 한다.
―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픽션들

보르헤스의 글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목 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아직도 이 문장 속의 유물이 정말로 유물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다른 번역본의 경우처럼 폐허를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번역의 미로에서 아무리 길을 잃더라도, 또 어쩌면 늘상 그렇게 길을 잃곤 하기에 나는 숱한 시간에 그의 책을 집어들곤 한다. 그리고 보르헤스를 읽는 따분함과 괴로움이 어느 순간에는 흔치 않은 즐거움이 되기도 한다. 
보르헤스가 토씨 하나까지 똑같은 두 편의 돈키호테를 전혀 다른 작품으로 해설한 것과는 반대로(혹은 어느 정도의 일치로) 서로 비슷하면서도 너무 다른 번역본에서 하나의 작품을 읽고자 애를 쓴다. 그것이 크리스티나 페리 로시의 제목처럼 "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이라고 하더라도 내게는 의미있는 일이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영화가 있어 나는 가끔 '사랑'의 자리에 '상상'을 집어넣곤 한다. 어찌 영화 속의 그들만 그러할까. 우리 모두 이역땅의 나그네 아니었던가. 번역은 되지 않을지 모르겠으나 상상은 가능할 것이다. 

"가끔은 새 몇 마리와 말 한필이 원형극장의 폐허를 막아주기도 한다."

나는 어느 번역판의 문장에서처럼 '원형극장의 유물'이라고 이해하기 보다는 '폐허'라고 상상하기를 좋아한다. 그것은 나의 걸음, 혹은 나를 향한 누군가의 걸음이 우리가 아는 세상의 한 모퉁이를 이루고 지켜가고 있음을 알고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2004. 4. JJ.Lee ⓒ
PS.
내가 접할 수 있었던 보르헤스의 여러 책들 ― 똑같은 책의 다른 번역들과 다른 책들 ― 가운데서도 녹진에서 나온 <허구들>(박병규 역)과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번역판(김홍근 편역)을 좋아한다. 배경음악은 보르헤스의 작품과 연관이 있는 아스또르 삐아솔라의 곡이다. 순환하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