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light bright upon my pillow 
lighter than an eiderdown 
will she let the weeping willow 
wind his branches round 
ㅡ Julia Dream, Pink Floyd

어떤 책은 거의 잊혀지고 어떤 노래는 오래도록 곁에 머문다. 어떤 영화를 보며 좋아했으나 더 이상 아무런 기억도 없다. 또 어느 짧은 순간의 느낌을 평생 잊지 않고 지낼 것이다. 그들에 관한 증거가 있거나 이미 사라졌거나 대단한 문제는 아니다.

'어떤'이라는 어휘는 때로 굳이 지칭하고 싶지 않은 각별한 무엇을 가리키곤 한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이름 붙여진 '어떤 노래', '어떤 책', '어떤 앨범'과 '어떤 일'에 관해서는 제대로 글을 써본 적이 없다. 
내 생각이 부족한 까닭도 있고 또 그 자체로 허접한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면 대개 그것들에 관해 단편적인 '기억'만 늘어놓았을 뿐이었는데 죠지 오웰의 <1984>의 경우가 그러하였다.

아주 오래전에 어떤 영화잡지에서 <1984>라는 제목으로 만들어진 영화의 장면 하나를 본 적이 있다. 윈스턴 스미스의 얼굴이 그 속에 있었다. 그게 맞는지도 모르지만 프랑스에서 만들었다는 희미한 기억만이 남아 있었을 뿐인데 있었는데 운좋게도 그 영화를 찾아 볼 수 있었다. 마이크 러드포드 감독이 1984년에 만든 <1984>가 그것이었다. 백남준이 <굿모닝 미스터 오웰>로 상큼하게 새해를 열었으나 (신선한 충격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의미에서) 적어도 우리에게는 '굿모닝'은 아니었던  바로 그해였다.
 

오렌지와 레몬이여, 성 클레멘트의 종이 말하네 / 그대는 내게 세 푼 빚을 졌지, 성 마틴의 종이 말하네... 채링턴 문방구 2층의 다락방에서 윈스턴 스미스가 주인으로부터 오래된 노래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문방구 주인은 그 노래를 온전히 다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온화한 노인네가 사실은 사상경찰이었고 그림 뒷편에는 텔레스크린이 숨겨져 있었다.

윈스턴 스미스(존 허트)는 잘 어울리는 듯 싶었으나 너무 무기력하고 늙어 보였다. 쥴리아(수잔나 해밀턴)의 이미지는 지나치게 딱딱한 느낌이었고 오브라이언(리차드 버튼)은 냉혹하게만 보였을 뿐 소설속에 자주 묘사되었던 특유의 신뢰감을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영화는 소설의 동어반복에 가까운 구성으로 테리 길리엄의 <브라질>과 알란 파커의 <더 월>을 연상케 했다. 이들 영화에도 <1984>의 느낌이 있으니 당연히 그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윈스턴 스미스 역을 맡은 존 허트는 엘리펀트 맨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1984년 4월 4일. 텔레스크린의 감시를 피해 윈스턴 스미스가 노동자 지역의 채링턴 문방구에서 산 크림색 노트에 처음으로 일기를 쓰던 날이다. 그의 기록은 부끄러운 옛날에 관한 회상에서 시작하여 급기야는 "대형을 타도하라"에까지 이른다.
 

자막도 없없지만 소설을 그대로 영화로 옮겨놓은 듯한 연출 덕분에 이해하지 못할 부분은 별로 없었다. 이 영화는 내게 어떤 '증거물'을 전해주었고, 그로 해서 간접적으로나마 <1984>에 대해 글 쓸 수 있음에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낀다.
텔레스크린의 볼륨을 줄일 수는 있어도 끌 수는 없다고 했다. 어떤 면에서 죠지 오웰의 <1984> 자체가 내게는 텔레스크린과 같은 무엇이었다. 세뇌가 아닌 각성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1984년에 있었던 일에 관한 '증거들'이 여기에 있다.
 

영화 The Wall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증오주간의 집회 광경. Big Brother의 양쪽으로 'INGSOC(영사)'의 상징이 걸려 있다. 이와는 조금 다른 형식일테지만 우리에게 증오주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식당에서 윈스턴 스미스를 바라보고 있는 쥴리아. 금단의 영역 ㅡ 그녀의 허리에 <청년반성동맹>의 상징인 진홍색 띠가 둘러져 있다. 윈스턴 스미스는 그녀에 관해 많은 꿈을 꾸었고 그녀를 증오했던 것은 현실적으로 그녀를 가질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Dreamboat Queen...

쥴리아와 윈스턴 스미스의 텔레스크린 앞에서의 조우. 그녀는 이 복도에서 고의로 쓰러지면서 윈스턴 스미스에게 쪽지를 전달했다. 그가 몰래 펼쳐본 쪽지에는 크고 못난 글씨로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임마누엘 골드슈타인이 쓴 "그 책". 쥴리아가 이 책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지 않자 윈스턴 스미스는 "당신은 허리 아래로만 반역"이라고 했다. "그 책"의 진짜 제목은 <과두적 집단주의의 이론과 실제>이다. 나는 오래도록 <1984> 자체가 소설 속의 "그 책"이라 여겼다.

몇달간의 감금과 폭행, 세뇌와 고문으로 앞니며 머리숱이 다 빠져버린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확인하는 순간.

누구나 자신의 삶에서 가장 두려워 하던 것을 만나는 "101호실". 흉폭하고 거대한 쥐와 나 사이에 둘 수 있는 것... 쥴리아. 

윈스턴 스미스가 그리던 "황금의 나라"를 바라보고 있다. 그의 곁에 있는 사람은 그를 이끌고 또 파멸시키는 오브라이언. 윈스턴 스미스가 쥴리아를 만났던 꿈의 장소이기도 하다. 만약 "황금의 나라"가 동전의 한쪽면이라면 그 이면은 틀림없이 "101호실"이었을 것이다.

애정성에서 풀려나 "카페 체스트넛 트리"를 바라보고 있는 윈스턴 스미스. 카페는 당의 대오에서 탈락한 사람들의 마지막 행선지다.

모든 것 끝난 뒤... 소설과는 달리 "카페 체스트넛 트리"에서 다시 만난 두 사람. 어쩌면 "황금의 나라"처럼 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작별도 없이 헤어졌고 그리고 지워졌다.

1984년에도 1984년은 절실한 무엇이었고 2004년에도 똑같이 그러하였다. 그것이 지향하는 정치적 사회적 이념과는 하등의 상관도 없이 모든 권력은 ㅡ 어느 정도는 편차는 있겠지만 ㅡ 그 자체로 우익적이며 보수적인 탓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본질에 관한 이야기이지 그것이 표방하는 외적인 형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나는 1984년이라는 '어떤 한 해'에 관한 기록이 너무 많은 해에 관한 증거물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물론 그것은 어떤 두 사람의 사랑에 관한 잊혀지지 않을 기록이기도 하다.
 

나는 그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으며, 계속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내가 그 이름을 부르지 않더라도 내 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정확하게 기억하지 않는다는 점이며,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이를 기억하는 것이다.
ㅡ J.L.B.
 
 

2004. 12. 31. JJ.Lee ⓒ
 

PS 1. 영화 음악은 Sweet Dreams의 유리스믹스가 맡았다. 하지만 나의 배경음악으로는 Julia Dream이 더 어울리는가 싶었다.
PS 2. 이 소설의 가장 즐겁고도 아픈 이야기 가운데 하나인 뱀과 사다리 놀이를 하던 날에 관해서는 따로 글을 쓰고 싶다. (아쉽게도 영화에는 그 장면이 없었다.)
PS 3. 처음 생각과는 달리 '화보집'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작자의 잡설은 조금씩 고쳐가면서 덧붙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