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머물렀던 자리에는 더 이상 무엇을 연결하거나 소통시키는 용도로는 사용하기 힘든 수천개의 철제 관(管)과 9만여개의 초코파이, 그리고 1만 3000여개의 컵라면과 생수병들이 남아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언제인지도 모르게 슬그머니 막을 내렸으나 그것으로 영영 끝난 것은 아닐 것이다. 남은 컵라면과 생수병이 어디로 갔는가에 대한 조금은 엉뚱한 의문처럼 또 그렇게.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일. 평화를 상징하는 하얀 비둘기가 푸른 하늘을 향해 눈부시게 날아가는 퍼포먼스가 있었다. 하지만 '팔로마 블랑카'에게 있어서 자유란 그들을 속박했던 곳으로부터의 거리와는 그다지 상관이 없었던 듯, 멀리 훨훨 날아 자유를 찾으려 하지는 않았다. 운동장의 지붕곳곳, 그리고 심지어는 성화대 둘레에까지 빼곡히 앉아 있었다. 
텔레비젼 중계를 보며 나는 참 조마조마 했다. 개막식 행사보다도, 최종 점화자의 모습보다도 비둘기의 안위에 생각이 미침을 어쩔 수 없었다. 걱정했던 일은 금세 벌어지고 말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세 사람의 젊은이가 성화대로 올라가 불을 붙였다. 점화는 순식간에 이루어졌고, 그 순간 비둘기들은 날아올랐다. 내가 좀 이상한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올림픽에 관해 지금까지 기억하고 또 가끔 생각나는 것은 오직 그 장면뿐이다. 
나는 틀림없이 그 하얀 비둘기들 가운데 상당수는 불구덩이 속에서 죽어갔으리라고 조금은 냉소적으로 말하곤 했다. 물론 지금은 그날 날아오른 모든 비둘기와 그 자리에 있었던 상당수 사람들의 행방에 대해 의구심을 가져야 할만큼 서글픈 세월이 흘러버렸지만 말이다.

옛 백제의 마지막 왕¹⁾은 만년에 들어 국정을 돌보지 않다가 660년 나당연합군의 침공을 맞아 백제 멸망의 상황을 맞게 되었다. 계백의 황산벌싸움을 마지막으로 백제의 방어선이 모두 무너져 수도 사비성이 나·당 연합군에 포위되자 의자왕은 태자와 함께 웅진성에 피신하였으나 끝내 항복하였다. 소정방에 의해 왕과 태자 효, 왕자 태, 융, 연 및 대신과 장사 88명과 백성 12,807명을 당나라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고구려 보장왕²⁾ 또한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자 당나라로 잡혀갔고, 고구려 멸망의 책임이 왕에게 있지 않다고 하여 당나라로부터 벼슬을 받았고, 677년에는 요동도독 조선군왕에 임명되기도 했다. 이는 요동지역의 동요를 막기 위한 부득이한 조처였으나, 보장왕은 보장받은 직위로 오히려 고구려 유민을 규합하고 말갈과 내통하여 고구려 부흥을 도모했다. 이러한 사실이 발각되어 유배되었다가 682년 무렵 사망하여 장안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아들로는 남복, 임무, 덕무, 안승 등이 기록에 남아 있다. 하지만 제국이 멸망한 후의 의자왕이나 보장왕의 행적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

1722년 부활절에 발견된 남태평양의 어떤 섬의 왕의 최후에 관해서도 이야기는 비슷하다. 부활절에 네덜란드인 야곱 로게벤(Jacob Roggeveen)이 이 섬을 발견함으로써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이 섬에 다른 나라의 문명이 밀려왔고, 특히 1862년 12월 12일은 그들에게 있어 비극의 날이었다. 주민 천여명이(인구 전체의 1/3 정도였다고 한다) 페루로 끌려가서 노예생활을 하게 되었고 섬의 인구는 회복불능의 상태로 격감했다. 일설에 의하면 라파누이의 왕과 제사장들 역시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남아메리카의 경작지로 끌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고 전해지는데 자세히 알려진 바는 없다. 이로서 롱고롱고 문자를 해독하거나 그들의 문명을 설명해줄 집단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기도하던 사람들은 사라져버리고 기원만 돌이 되어 남은 것일까.

공포소설 작가 딘 R. 쿤츠의 책 가운데는 역사적인 실종을 태고적부터 존재했던 신적인 스케일의 괴물의 소행으로 상정한 이야기가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가재도구나 심지어 음식물까지도 남겨둔 채 사라져버린 마야족의 실종 미스터리나, 메리 셀레스트호에서 일어났던 선장 가족과 선원들의 실종, 중국인 병사들의 실종 등등이 그 사례로 언급되어 있다. '희박한 대기속으로' 사라진 그들에 대한 신비스런 추측들이 유행하던 시절도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어느 일요일, 친구를 만나 근처에 있는 레코드방엘 갔었다. 가게를 정리하게 되었는지 아니면 세일 기간이었는지 레코드판들을 평소보다 상당히 싼 가격으로 판매하고 있었다. 같이 갔던 친구와 나는 이것저것 구경하다 앨범 몇장을 구입했다.
하지만 길을 가다가 담임선생님을 만났는데 그는 우리가 레코드판 갖고 있는 것을 보고선 압수를 했다. 나는 한번쯤 교무실에 불려갔을 때 책상 큰설합 속에 그 판들이 있는 것을 본 기억이 난다. 하지만 우리들은 끝내 그 앨범들을 돌려받지 못했다. (그 담임선생님도 오래 전에 돌아가셨다.)

수많은 카메라 플래시의 세례를 받던 모터쇼의 전시 차량들은 행사가 끝난 뒤 어디로 갈까? 2월의 어느 하루를 위해 가게마다 쌓여 있던 초콜렛들 가운데 어떤 연인의 손으로도 가지 못한 채 남겨진 것들은 모두 어떻게 될까? 단 며칠 사이에 사라져버리는 그들의 운명은 어떤것일까? 그것들을 주고 받은 이들의 사연은 초콜렛의 상표 만큼이나 지속되는 것일까... 발렌타인 데이에 남은 초콜렛이나 전시 차량의 행로에 관한 기사를 본 기억도 있지만 그 답을 다 찾는 것만이 차와 초콜렛의 사연에 관한 전부는 아니다.

어떤 이야기든 전혀 답을 찾을 수 없는 것은 없다. "싸이렌들이 무슨 노래를 불렀는지, 혹은 아킬레스가 여자들 사이에 숨어 있었을 때 무슨 이름으로 행세했는지는 골치 아픈 문제지만 어쨌든 전혀 추측할 수 없는 일은 아니다." ― <모르그가의 살인사건>에서 에드가 앨런 포가 인용했듯²⁾, 전혀 추측할 수 없는 사실은 없다. 컵라면이 그들의 원래 소유주에게로 돌아가지 않았다면 그것이 어디로 갔을지 추론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지엽적인 문제이겠지만 따지고 보면 지엽적인 그런 것들이 중첩되어 종유석 동굴이 생기고, 삶이 이루어지거나 대륙의 모습이 크게 움직이고 그리고 세계가 구성되는 것일 것이다. 내 무료함에 보태어 컵라면의 향방에 대해서 조금 궁금했던 것도 그런 까닭일 뿐이다.

컵라면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꽃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가끔은 그렇다.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기에 그것이 존재할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은 일일 것이다. 적당히 묻혀 있는 것이 그것이 존재하는 최선의 방법일 때도 있다. 슈뢰딩거의 상자 속에 들어 있는 고양이의 운명처럼, 또는 묻혀버렸기에 살아남은 폼페이처럼...
크든 작든 원하든 원치 않든 누구나 무엇인가를 잃어버리곤 한다. 어떤 것은 어렵지 않게 복구되고 또 어떤 것은 돌이킬 수 없다. 그럴 때면 사람들은 무엇인가 존재했던 시절 대신 잃어버렸다는 사실 그 자체를 기억하곤 한다. 진실로 빈 것은 비어 있지 않으며, 그렇다고 가득 채워진 무엇도 아니다. 세상에, 혹은 어느 하루의 마음에 빈자리가 있다면 사실 그것은 빈자리가 아니라 그런 것들로 채워진 자리일지도 모른다. 나만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떤 사람들은 '나쁜 습관'을 가지고 있다. 행방이 분명하거나 쉽게 추측 가능한 것보다는 묘연하거나 찾기 힘든 것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곤 하는 것이다. 어딘지 모르지만 있다는 것만으로도 족한 것 또한 많다.

Where have all the graveyards gone?
Long time passing
Where have all the graveyards gone?
Long time ago
Where have all the graveyards gone?
Covered with flowers every one
When will we ever learn?
ㅡ 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 Pete Seeger
 
 

2008. 5. 10. 토. JJ.Lee ⓒ
 
 

1) 무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효성과 형제애가 지극하여 한때는 해동증자(海東曾子)라 일컬어졌다. 신라를 공격하여 많은 성을 빼앗고 신라에 큰 타격을 주었고 국위의 만회에 힘썼으나 결국엔 백제의 마지막 왕이 되고 말았다. 의자(義慈)는 왕의 시호가 아닌 휘(諱)로서, 그에게는 왕의 시호가 따로 없다고 한다.
2) 고구려 제28대 왕이며 마지막 왕(642∼668). 영류왕의 동생인 태양왕 아들로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잡은 연개소문에 의해 왕으로 옹립되었기 때문에 왕으로서의 실권을 가지지는 못했다.
3) 토마스 브라운
 

*대부분 작년에 썼던 것인데 마무리를 못하고 있다가 오늘 조금 손을 봐서 올렸다.
(매우 부족하지만) 부족한 부분은 실시간으로 고쳐나갈까 한다.
말이 될려다 말았건만... 글 쓰는 시늉이라도 필요한 날인 것 같아 어색함을 무릅쓰고 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