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비우다."
가끔 그 말이 의미심장하고 간절한 것으로 들릴 때가 있었다. 속물적인 유형의 인간이기에 그랬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는 가끔 비현실적인 상상을 하곤 했다...

그것이 실재로 발생했거나 존재했던 것인지조차 심히 의심스러운 짧은 순간에 관한 단속적인 몇몇 기억을 버리지 못한 까닭으로 그는 고통과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그는 상반된 사고와 중첩된 지식의 단애에서 산산조각으로 흩어지는 악몽을 꾸곤 했다.
악몽 속에서 그는 가끔 방전되어버린 전지와 추상적인 동일성을 획득하곤 했다. 절반쯤은 스스로 파멸을 원했기에 가슴 쓰린 희열이었음과 동시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답답함과 고통이었다. 하지만 그 어느 쪽이라 해도 결국 똑같은 것, 그는 끊임없이 단락을 향하여 집요한 시도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 모든 통탄스러운 증세는 심리학적 용어로 분석 가능할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에 관해 말하자면 그것은 온당한 처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그것은 자극적인 함몰상태이거나, 전기적 방전상태에 더욱 가까운 무엇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충전식의 전지에는 메모리 이펙트라는 게 있다. Ni-Cd 전지, Ni-MH, Li-Ion 등의 충전지가 모두 그러하다. 기억 효과란 충전 전지에서 충전된 용량을 완전히 다 쓴 상태, 그러니까 방전 상태에서 충전하지 않을 때 발생하는 일종의 기억 오류 같은 것이다.
좀더 설명하자면, 전지의 어느 정도의 잔량이 있을 때 충전을 실행하면 그 잔량을 방전 상태의 최저치로 보고 충전이 시행되어, 이후에는 잔량 상태를 에너지가 다 소모된 방전 상태로 '기억'하게 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이러한 오류적 인식이 일회적인 실수로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지는 않지만 불완전 방전에 의한 충전이 되풀이 되면 메모리 이펙트는 갈수록 심각해져 전지의 사용 시간이 짧아지고 수명을 단축시키게 된다.
충전지를 사용하는 전자제품을 구입해서 매뉴얼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제품의 최초 사용시 완전한 충전을 권장하는 것도 메모리 이펙트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Ni-Cd식 전지에서는 완전 충전, 완전 방전이 전지의 성능과 수명 연장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Ni-MH 전지나 Li-Ion의 경우에는 메모리 이펙트가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전혀 없는 것은 아니기에 완전 충전과 소모가 전지의 장기적 사용에 약간의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에게 있어서 기억효과는 그런 것이었다.그 자신 낡은 Ni-Cd 배터리라면 누액이 흐를 만큼 지쳐버렸을 것이다. 그가 이미 너무 많이 겪어버린 메모리 이펙트는 평생토록 그를 따라다닐 것이다. 전지가 수명을 다하는 마지막 순간, 달리 말해 메모리 이펙트가 극점에 이른 그 순간에 그를 가득 채우고 있는 상념은 무엇이겠는가.말하지 않아도 가끔은 그게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는 사람도 있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자신만의 메모리 이펙트를 주의깊게 고려하고 유지하려 할 것이다.
이러한 그의 생각들은 우려할만큼의 유물론적 병폐일까. 어떤 사물 ㅡ 그것도 공장에서 생산된 배터리 같은데 자신을 비유한다는 것이.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그것이 유심론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래서 문제는 더 심각한 것일지도 모른다.

세상이 바뀌어 갈수록 기억 효과는 점점 희박해질지도 모른다. 기술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고, 싫든 좋든 그 기술을 이룩한 사회의 구성원이기에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는 그것이 자신을 단축시킨다고 해도 그렇게 스러져버리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자신이 실행할 수 있는 너무 쉬운 일이었기 때문일지도. ㅡ 그는 단락되었다.
만약 그 자신이 전지가 아니라 그 전지를 사용하는 기기라면 물론 기억효과가 아닌, 기억 그 자체를 어떤 형태로든 자신속에 유용하게 수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ㅡ 그는 그렇게 되고 싶었다.
 

1999. 8. 20. JJ.Lee(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