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를 파다
쌀쌀한 날씨 탓인지 어지러운 꿈자리를
따라 자꾸 침대 속으로 몸을 파묻었다. 나의 꿈꾸는 여자. 그러나 무엇으로도
회복하지 못할 그리움을 배갯잎 끌어안고 어찌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이불 속 깊이 파묻힌 그리움으로는 부족했던
탓일까. 나는 하염없이 심연으로 내려가고 싶었다. 바닥에 도달하기 전에 이루어질
조우를 믿었고, 그것에 관한 예감을 넘은 확신 ㅡ 샴푸 광고에서 보았던 것
같은 틀림없는 머리칼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따스함과 포근함은 궁극에
있는 법, 희미하니 몇번 잠을 깨었지만 주위는 어두웠고 손에 잡힐 듯했던 그녀의
머리칼은 좀더 깊은 곳에 있는 것 같았다.
왜 가까워지지는 않는 것일까.
한 겹의 비밀을 통과할 때마다 비슷한
거리에서 향기가 퍼져나왔다. 나는 말할 수 없이 혹독한 한기를 느끼며 자꾸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것은 당연한 간절함이기도 했지만 달리 선택할
길이 있을 수도 없었다.
어느 순간 나는 시트 밑으로 파고 들었고,
다음 순간 나는 겹겹히 쌓인 복원력 강한 신소재의 지독한 틈바구니에 가위눌려
있었다. 이제 겨우 시작이었고 거리가 아닌 회복 불능의 괴리로 넘어가는 단절이었다.
"맙소사... 저 거리가 바로 십만년이란
말인가. 내가 십만년을 한 눈에 보고 있다는 말인가. 그럼 어디까지가 실체이며
어디까지가 허상이란 말인가. 어느 지점이 과거이며, 어느 지점이 현재란 말인가."
도무지 내 시야 안에 담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나선은하의 아름다운 회전을 보았고 두 은하의 조우와 충돌에 가슴 아파
하였다. 그 모두가 나의 작은 우주 속에 존재하여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보석으로
빛나고 있었지만 얼마나 많은 문명과 생명, 원시의 대양과 위험천만한 고대의
대륙이 무너지고 있는 것인가를 생각하면 그 푸르고 붉은 빛의 환은 눈물어린
눈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이중영상 같은 것이었다.
나의 꿈꾸는 여자. 그 사이에도 나는
어지러운 용수철의 삐걱임을 감수하며 이리저리 뒤척이고 있었다. 그것들의
갈퀴처럼 뾰족한 끝이 가슴을 후벼파는 순간이 있었건만 결코 고통스럽지 않다는
것만이 꿈꾸는 자의 즐거움이겠지...
급기야 나는 떨어졌다. 캐캐묵은 송진
냄새와 에나멜 도료의 희미한 냄새 너머로 몇올의 머리칼처럼 실마리를 던지는
분내음을 맡았고, 실제로 둔탁한 추락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무디고도 치명적인 소리에 눈을 떴지만
깨어난 곳이 어디인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몇 시쯤 되었는지를 짐작하기에
바깥은 여전히 너무 어두웠다.
잠깐 잠들었다 깨어난 것일까. 불과 몇분
사이에 나는 많은 세상을 오가며 꿈을 꾼 것일까. 또다시 몇 초인지 몇 분인지
몇 시간인지 헤아리지 못할 '간격'을 넘어 나는 또렷하니 의식을 회복했지만
여전히 내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너무 낮은 천장, 너무 좁은 벽, 35...
이제사 겨우 손을 뻗어 오래도록 쌓인
듯한 먼지와 보풀의 감촉을 깨달을 수 있었다.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니 엄지
손톱 만한 틈새로 빛이 보였다.
의식을 찾아감에 따라 그 틈새는 점점
자신에게 맞는 안경으로 도수를 올려가는 것처럼 작아지고 또렷해지더니 결국은
완벽하게 둥근 아주 조그만 점이 되었다. 그때서야 나는 그 작은 점이 그녀의
눈동자의 빛임을 깨닫게 되었다.
"맙소사... 이 거리가 바로 세월이란
말인가..." 다시 잠깐의 혼돈 상태가 지나가고서야 비로소 진상에 도달하고
있었다. 나는 침대 아래에 있었고, 잡다한 책과 비디오, 와이셔츠와 넥타이,
옛 노래들이 담긴 카세트 테잎을 넣어둔 낡은 종이 상자들이 나를 완벽하게
가두고 있었다.
35. 비밀이 풀리는 순간...
어쩌면 고대인이 뼛조각에 정성껏 새겨둔
별자리 운행의 기록처럼, 또는 로빈슨 크루소의 달력같은 칼자국으로 심장이
너덜거렸다. 그러나 모든 꿈과 고립은 그저 용수철 하나가 벌레먹은 낡은 싸구려
침대의 합판 받침을 삐져나와 내 뺨을 그렇게 긁은 것과 같은 사소한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1999. 10. 23. JJ.Lee(c)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