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는 깨끗하고 또 춥고 해서 사과를 먹으면 시려워진다.
어째서 그렇게 냉랭한지 책상 위에서 하루 종일 색깔을 변치 아니한다.
차차로 - 둘이 다 시들어 간다.
<각혈의 아침, 이상>

아홉통의 편지를 받았다. 그것은 모두 내가 읽었던 시였는데 하나같이 제목이 바뀌어 있었다. 어떤 편지는 제목이 무척 길었고 어떤 편지는 아주 짧았다. 제목만으로는 그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으나 읽어내려가는 사이 글자마다 압침이 하나씩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다치지 않으려 무척이나 조심해야 했다. 아홉번째 편지는 "사과"라는 제목이었다.
하지만 편지를 뜯으려는 순간 갑자기 사방이 어두워져 더 이상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여덟통의 편지가 해를 가리고 달을 가렸다. 희미한 스탠드도 더이상 빛을 발하지 않았다. 손을 더듬어보니 그것은 편지가 아니었고 플랑셰트나 위저보드처럼 보였다. 철자가 부지런히 돌아갈 때 무턱대고 갖다댄 손만이 그게 무엇인지 명확히 깨닫을 수 있었다. 편지를 읽어내려가는 사이 현기증이 일어났다. 손가락 아래가 흥건히 젖어들기 시작했고 점점 읽기 힘들어 나는 더욱 급히 손을 움직였다. Ouija, 그것을 번역하면 아래와 같다.

먼 사람이 그대로 커다랗다 아니 가까운 사람이 그대로 자그마하다
아니 어느 쪽도 아니다 나느 그 어느 누구와도 알지 못하니 말이다
아니 그들의 어느 하나도 나를 알지 못하니 말이다 아니 그 어느 쪽도 
아니다(레일을 타면 전차는 어디라도 갈 수 있다)
<각혈의 아침>
 

2000. 5.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