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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르시스의 율법
"그 진흙길로 가면 어떡해!"
나는 처음으로 여자의 손을 잡고 있었다.
어떤 음악실이었다. 웃으면서 그녀의 손과 나의 손을 깍지꼈다. `우리'라고
느꼈다. 모든 신경이 연결되어버린 듯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감촉,
그녀의 손에서 느낀 차가운 감촉은 몹시도 선명하여 눈물이 흐를 정도였다.
그리고 그 즐거움은 오래 가지 않았다. 안경을 낀 초로의 작곡가는 보청기를
쓴 채 찡그리고 있었다. 그는 무엇인가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어 보였다. 음악의
볼륨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우리의 마주잡은 손 때문이었는지 작곡가는 신경질적으로
일어서며 고함을 질렀다.
단지 그녀의 입술을 차가웠다. 그러나 앞으로도 꿈은 계속되리라는 예감을 지난 확신이 나의 끝없는 밤에 수면을 주는 것이었다. 어느 해변이었다. 아무도, 아무것도 없는 모래 사장에 둥근 테이블과 두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그 빛깔이, 모든 배경이 하얗게 생각되었다. 그녀와 나는 가벼운 옷을 입고 마주앉아 오래도록 이야기 하였다. 맨발에 쏠리는 모래가 태양의 빛을 받아 반짝였다. 태양조차가 하얗게 춤추었다. 그녀와 내가 앉아서 이야기 했지만 또한 나는 먼 곳에서 하얀 파도와 하얀 테이블과 두 사람의 웃음을 보고 있었다. 그것은 한없이 길게 느껴졌지만 내가 기억하는 것은 내 손안에 들어오는 단 한장의 움직이는 사진이었다. 나는 로마숫자가 새겨진 커다란 괘종 시계
앞에 서있었다. 그것은 일요일을 위한 시간을 상징하였으며 12개의 숫자가 모두
3이었다. 낯모르는 이국의 거리, 일요일을 위한, 오후를 위한, 3시를 위한 배경이었다.
한 소녀가 신문지 모자를 쓰고 강물을 배경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넥타이를
매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때 갑자기 폭음이 일어나더니 철교 위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그리로 몰렸다. 나도 약간 늦었지만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들어가 화재를 목격하였다. 그러나 소방수들은 다리 아래 강물에
몸을 적신 채 아무런 문제도 없이, 번민도 없이, 아무도 의식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무엇인가 이야기하며 웃고 즐거워 하였다. 혼자 놀라워하고 있는데 옆에 섰던
사람이 무표정한 모습으로 성냥갑을 보며 말했다.
몇개의 나와 약간의 그녀가 맞부닥거린다. 팔은 어디서든 나를 잡고 그 날랜 손으로 또 누군가를 붙들고 있다. 만나려고 하여도 앞에 가서 보면 그녀가 아니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얼굴을 잊어먹곤 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K의 도착을 기다리며 초조해
하였다. 거기는 틀림없는 도로변의 조그만 광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온통 검정색으로
칠해진 비행기는 무거운 폭음을 울리며 착륙하였다. 나는 K가 탑승한 비행기가
사람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공중폭발하거나 착륙때 어디 부딪혀버릴 것을 바랬지만
그는 무사하였다.
전등갓이 씌워진 밝은 전등불 아래에서 트럼프 놀이를 하고 있었다. 적적한 분위기였지만 어디선가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성냥을 켠다 불빛이, 타들어 가는 걸
본다
돈을 계속 잃고 있었다. 지폐를 잃어면서도 동전은 따야 한다고 생각하며 노래를 따라서 흥얼거렸다. 우리들 사이에 동전이, 동전이 더 소중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깰 수 없는 율법의 벽에 갇혀 있었다.
그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얼굴을 하였으면서도 나에게 찰흙같은 감촉을 지닌
폭발물을 무조건 던지라고 고함을 지르다 내가 응하지 않자 무턱대고 나를 향해
그것을 던지는 것이었다. 나는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수초 후에 폭발하게끔
장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쪽에서는 형체를 알 수 없는 두려운 것이 어둠
뒤에 숨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마냥 즐거웠다. 그것은 공포에 질려 허둥대는
K의 모습이 보여서였다.
그녀는 또 안된다고 했다. 약속이 있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친구들과 어떤 도시의 백화점을 찾아갔다. 온통 붉은 조명 투성이로 간판에는 중국집 이름같은 것이 씌여 있었다. 한 산뜻한 용모의 여자가 돈을 지불했는지 물었다. 내가 고개를 젖자 그녀는 위층에서부터 아래로 나를 안내해주기 시작했다. 좀 침침한 곳이었다. 초콜렛은 모양이 좋지 않아 그만두었다. 한 노파가 여러가지 모양의 초콜렛을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 골랐으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아서 달라고 하였지만 다른 것을 주어서 다시 말하여도 여전히 다른 것을 주었다. 수많은 초콜렛 가운데 그녀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별수없이 아무거나 하나 받아쥐었는데 곧 두동강으로 나누어지고 나를 안내하던 여자는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한 친구와 진흙탕을 걸어 어느 시골의
골목 깊숙히 우리를 보았다. 그곳에는 덮수룩한 모습을 한 오십대의 남자 몇몇이
담배를 태우고 있었는데 몹시도 비참하여 가슴이 아팠다. 그들을 떠나서 가려다
가축 냄새가 날까봐 물을 찾아 뛰었다. 앞서가던 무리의 한사람도 뛰기 시작하였다.
그도 나와 비슷한 속력인지 따라잡기가 어려웠다. 어쨌든 그를 지나야 손을
씻을 수 있었는데 결국은 그를 따라내어 빗물에 손을 씻었다. 그도 곧이어 도착했는데
손을 씻지도 않고 나를 향해 씽긋 웃어보이고는 떠나버렸다. 그런데 지금껏
함께 있던 친구가 보이질 않았다. 정류소를 온통 뒤졌지만 없었다. 이 외지에
나를 두고서 혼자 떠나면 어떡하나 하고 원망스럽고 불안하였다. 그런데 얼핏
그 친구가 버스를 타는 모습이 멀리 보였다. 나는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거기 도착했을 때 버스는 이미 떠나가고 있었다.
어디선가 본듯한 골목의 침침한 단칸방에서
언젠가 한듯한 행동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전에 꾼 꿈을 다시 만나는
것인지도 몰랐다. 한 외국 소년과 함께였다. 그와 나는 다른 관점으로 악수하고
있었다. 그 소년은 단지 나를 따르는 것이었고 나는 그의 나라를 여행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천사인지도 몰랐다. 소년은 침침한 골목의 칙칙한 방을 혼자 찾아왔지만
곧 잠이 들고 말았다. 넥타이를 풀지도 않고 그는 혼곤히 잠이 들어 있었다.
몇시간이나 흘렀는지도 모를 정도로 나는 멍청히 앉아 처음 대하는 사람과 공식적인
대화를 주고 받았다. 밤이 이슥했는지 소년은 깨어나더니만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인사도 없이 서둘러 떠나버렸다. 그가 떠난 뒤 너무도 허전하고 적적하여
습관적으로 잠을 청하였다.베게를 끓어안으니 소년의 머리기름 냄새가 코를
찔렀다. 독하기는 하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그리움과 향수를 주는 것이었다.
(자꾸만 벼랑에서 실족하였다. 그것은 가장 피상적인 추락이었고, 그때마다 몸을 움찔거리며 깨어났다가 다시 안도하며 잠이 들곤 했다.) 거기는 모임이 있는 곳이었다. 스스로
청한 율법의 벽에서 나와 벌거벗고 서있는데 그녀도 옷을 입지 않은 채 나에게로
걸어왔다. 태양은 그녀의 등 뒤에 있었고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오래전부터
먼 미래까지 그녀는 나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얼른 고개를 돌리며 풀밭에
앉았다. 그녀는 내 팔을 붙들고 연극적으로 울며 말했다. 그것은 너무 애원하는
것이었다.
...새벽이 되면서 난방 장치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천정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처음 소리와 다음 소리, 그 다음
소리, 그 소리들간에 점차적으로 간격이 줄어들면서 빨라지고 커지다가 다시
느려지면서 결국은 사라졌다. 그러나 최후의 소리는 듣지 못했다. 나는 그 마지막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것은 그녀의 이야기 하는 모습, 웃음, 신경질, 걸음걸이
같기도 하였다.
198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