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눈을 감고 있는 동안 이 세상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생각해보라.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에 대하여. 이 세상 누군가 그 순간을 보고 그 순간을 느낄 수만 있다면...... 

그녀는 세면대에 허리를 굽힌 채 불편하게 머리를 감고 있었다. 
수도꼭지에선 계속 물이 쏟아지고 있다. 하수관으론 물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며 환풍기 소리도 들린다. 
샴푸가 그녀의 머리를 하얀 거품으로 뒤덮었고, 그녀의 눈 언저리에도 여기저기 거품이 묻어 있었다. 어느 순간 눈이 따가워져 더 이상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어 그녀는 불끈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목욕탕의 천장이 사라졌다. 벽이 사라졌다. 욕조도 사라지고 마른 수건을 넣어두던 찬장도 사라졌다. 한쪽 벽을 뒤덮은 거울도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가 한 손을 대고 있는 세면대는 아직 있다. 그녀가 발을 디딘 타일도, 그녀가 신고 있는 슬리퍼도 아직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수도꼭지는 사라졌다. 무한히 어둡고 무한이 광막한 공간의 알 수 없는 한 지점에서 그냥 물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그녀가 모르고 있는 동안 하수도 관에서 나온 물은 알 수 없는 미지의 공간으로 사라진다. 그녀가 발을 옮기는 순간 여태 디뎠던 그 타일 마저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그녀의 슬리퍼가 닿게 될 꼭 그만큼의 공간이 다시 나타났다. 
그 순간 이 우주 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태양도 없고, 달도 없다. 인공위성도 없고, 빌딩도 없다. 도시의 소음도 없고, 그 무엇도 없다. 그저 높이도 없고 깊이도 알 수 없는 광막함 속의 알 수 없는 한 지점에서 물이 쏟아져나오고 있고 그녀는 그 물로 머리를 감고 있다. 
그리고 이 깊은 공포의 절정에서 그녀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눈을 뜬다. 물론 비명은 없다. 맑고 깨끗한 그녀의 눈매와 긴 머리칼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1998. 8.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