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야말로 적이 내습하는 시간이다.
- 그 적은 자정너머 깨어 삶을 생각해본 사람이면 안다
모두들 얼굴에 검정칠을 하고 적당한 방호처에
몸을 숨겨야 한다. 기도비닉,
야간이동에서는 한걸음씩 천천히 움직여야 한다.
몸도 가눌 수 없이 흔들리게 하는 허무를 은닉하고,
소리에도 신경써야 한다.
ㅡ 1990. 6. 18.

인적없는 밤의 공항은 몹시도 춥다. 가장 더운 계절에조차도 한밤엔 반소매를 입을 수 없을만큼 춥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믿지 않는다. 어깨를 교차해서 야광띠를 매고 허리에는 탄띠가 둘러져 있다. 수통의 물은 오래되어 마실 수가 없다. 
어쩌다 늦은 비행기가 이륙하면 굉음이 정신을 어지럽게 만든다. 나는 그 소리를 듣는 동안 소리란 종류에 따라 무게를 갖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크다고 반드시 무거운 것은 아닌데 비행기가 질러대는 굉음은 중력을 반하는 그 힘으로 인해 어마어마한 무게를 내 정신에 가하는 것이다.

비행기 소리가 사그라들고 나면 외곽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들의 소리가 아스라히 들린다. 그 소리는 유난히 정겨운 느낌을 주는데 
이상하게도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나는 도플러 효과를 따라 높아지는 소리, 낮아지는 소리를 더듬으며 아주 느린 음계를 짚고 그것을 노래처럼 감상하곤 했다. 
이런 태평스런 때가 있는가 하면 가끔씩은 수상쩍은 분위기를 느끼고 임무에 충실한 채 검문을 강화한다. 실내를 순찰하는 자들이 있지만 그들은 너무 안이해서 믿을 수가 없다. 5분대기조로 편성된 동료들 역시 믿을 수는 없다. 내가 그러했듯이 그들 또한 지금 이 시간엔 그 누구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오늘은 전혀 졸음이 오지 않는 것이 도리어 문제다. 사실 이곳이야 말로 관문이라는 이름의 사각지대인 것이다. 속속들이 들어오는 차량 가운데 위험한 무엇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세상과의 교신을 교란시키고 왕래를 차단하며 분란을 초래하고 내 마음을 무너뜨린다. 나는 몹시도 심하게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초소 안의 자그마한 텔레비전에서는 나 대신 한 정치가가 심하게 눈을 깜빡인다. 그는 자신의 입지 때문에 몹시도 불안한 탓일테고 나는 깨어 있는 것이 힘겹기 때문이다.

공항 입구. 직선으로 뻗어 있는 도로의 끝에 지프 한대 급하게 들어서더니 끔찍스런 브레이크 소리를 내며 곧장 멈추었다. 주변의 어둠으로 해서 자동차 불빛이 몹시 눈부셨다. 꽤 먼 곳이었음에도 자동차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가 밤의 정적을 깨고 초소까지 들려왔다. 귀에 익은 노래다. 옛 디스코 시대의 노래 Macho Man이 쿵쾅대고 있었다. 
차에서 내린 사나이는 아주 느린 몸짓으로 초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거리에 비해 그의 덩치가 너무 큰 것이 대단히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엄청난 근육질의 사내는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지만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내게 접근해 왔다. 초소 앞에 있는 높다란 바리케이드가 그에게는 전혀 장애가 되지 못했다. 
나는 짐짓 경계의 몸짓을 보이며 실탄을 장전하려 했지만 모두가 공포탄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몹시도 힘이 빠져 제대로 서있을 수조차 없었다. 안간힘을 다해 겨우 입을 열어 그에게 신분증 제시를 요구했다. 그는 가소롭다는듯 미소띤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 입김을 뿜었다. 이토록 추운 날이었던가... 순식간에 뽀얀 연기가 앞을 가렸고 혈관속으로 따뜻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실내... 어느새 나는 제복도 없이 공항 안을 거닐고 있었다. 입국장과 국내선이 없는 출국장 뿐인 곳이다. 라운지에서는 자그마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곳엔 의자들로 가득했다. 수수깡에 알록달록 색칠해서 만든 그 의자에 앉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공항 경비원이 아닌 나는 저 안쪽 출국장으로 들어갈 수 없는데 낯선 얼굴 하나 내 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녀는 바퀴가 달린 
자그마한 여행용 가방을 끌고 있고 한 손엔 노란 서류봉투 하나 들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 속에 있는 말못할 공포가 내게 전해져 나는 
몹시도 괴로웠다. "아니, 봉투를 거꾸로 들고 있잖아. 저러면 서류를 다 잃어버릴텐데..." 나는 힘껏 소리를 질러보려 했지만 언제나 
그러했듯 말문은 막힌 채 열심히 손짓으로 대신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나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서류를 힐끔 바라보더니 바로 
들고 있었다. 무엇인가 여전히 못한 말이 있는데 더 이상은 전해줄 길이 없었다. 돌아서는 내 어깨를 그녀가 오래도록 기억함을 나는 
알고 있다.
까닭없이 마음이 무거워 청사 후미진 곳에 있는 흡연실을 찾았다. 그곳에는 카우보이 복장의 우람한 사내가 아주 긴 담뱃대로 연기를 피우고 있었다. 그는 내게 멍키 스패너를 들어 보이며 힐끔 쳐다보더니 웃음을 지었다. 
공항의 가장 깊은 곳을 들여다 보고 싶은 마음 뿐이었으나 그곳을 감싸고 도는 공포가  어떤 것인지는 짐작할 수도 없었다. 나는 무릎 꿇어 바닥에 머리를 대었다. 오체투지의 순간에 아주 작은 느낌이라도 있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기울였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비행기의 출발을 알리는 전광판만 소리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이곳에는 이륙의 사고도 전혀 없고 지연과 결항도 없다. 
이 세상 어딘가에 감춰진 얼굴...

공항을 빠져나가는 자동차의 굉음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지프차의 사내가 경적을 울리며 내 앞을 지나가고 있었고 나는 초소 담벼락에 기댄 채였다. 바지의 주름을 돋보이게 하고 가지런히 해주던 무거운 볼들이 모두 빠져 내 앞을 뒹굴고 있었다. 
갑작스레 사람들이 웅성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자동차 소리, 경적 소리, 웃음 소리, 비행기 엔진의 굉음, 화장실에서 들려오는 헛기침과 수도꼭지의 삐걱임, 물 내려가는 소리, 호각소리... 이런 것들이 점점 더 크게 점점 더 빨리 들려오고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하염없이 기다리며 파수를 섰다.
나는 평생토록 제복을 입고 있다. 보이지 않는 견장이 내 어깨를 무겁게 하고 빛나지 않는 흉장이 내 가슴을 찌른다. 경계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내 마음의 공항을 지키는 것은 날이 갈수록 더욱 벅차다. 언제가 임무가 끝나는 날엔 활주로에 누워 노래 흥얼거리다 
잠들고 싶다. 그가 만들어낸 안개가 아직 잦아들지 않아 오늘은 비행이 어려울 것이다. 불침번이 교대자를 깨울 때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2000. 11.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