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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상붙은 페이지
우리들의 정신에는 망각으로 뚫려 있는
수많은 구멍들이 있다. 나 자신 또한 세월이라는 슬픈 풍상 작용 속에서
베아뜨리스의 모습을 변질시키고, 상실해 가고 있다.
공룡이 멸종되지 않고 살아남아 계속 진화했다면
그들은 어떤 식으로 적응하며 변화했을까. 여기에 관한 추론으로 만들어진 "공룡형
인간"의 가상적 학명과 그림을 찾아 헤맨 적이 있었다. 그 이름은 Dinosauroid였으나
그렇게 진화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공룡의 이름을 찾을 수는 없었다. 한참을
포기하였으나 몇달을 헤맨 끝에 결국 찾을 수 있었는데 백악기 말기에 살았던
그 공룡의 이름은 스테노니코사우루스였다. 오늘 이 글을 쓰면서 되풀이해서
확인한 것이지만 나는 같은 책을 계속 뒤지면서도 그 이름을 그냥 넘어갔었다.
마치 도서관의 천사가 공시성(Synchronicity)이라는 이름의 마법으로 무장한
채 원하는 책이며 페이지를 기적처럼 찾아주듯 망각의 작은 악마는 훼방꾼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잘못된 "세익스피어의 기억"이었을까,
"허구 Ficcion"였을까. 다시는 찾기 힘든 "모래의 책"의 한 페이지였을까. 어떤
글의 마무리를 위해 나는 보르헤스의 몇 줄을 인용하고 싶었다. 직접적인 인용이
아니어서 꼭 원문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문득 그 출처를 다시금 살펴보게
되었다. 나는 그것이 <알렙>에 수록된 어느 작품, 혹은 같은 제목의 단편에
있으려니 생각했으나 아무리 뒤져도 나는 원하는 내용을 찾을 수가 없었다.
"기억의 천재 푸네스"의 머리속에도 그것은 없었고 "바벨의 도서관"을 아무리
뒤적여도 나는 찾을 수가 없었다. 책에 관한 그의 강연에 귀를 기울여도 "두
갈래 오솔길이 있는 정원"을 온종일 걸어보아도 내가 분명 보았던 그 풍경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은 보르헤스 자신의 어린 시절에 관한 기억으로
덮어둔 책을 밤새도록 그냥 두면 그 글자들이 서로 겹치고 엉키어서 결국은
사라질 것이라는 상상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그 상상이 상징하는 다양한 의미들을
자각하며 다시 한번 그 글의 전후를 돌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답답해 하던 나는 이것이 내 인생에서 중요한 일인가 몇번씩
생각해 보았는데 그 의미없음이 나름대로 유의미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나는 책을 펼친 상태에서 그 글자들이 있는 위치를
지적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마도 그것은 오른쪽 ― 그러니까 홀수 페이지 상단이
될 것이다. 나는 찾지 못한 몇행의 글자들에 현상을 붙였다. 보상은 벌써 시작되었으나
나는 아직도 그 짤막한 부분을 발견하지 못했고 내가 그리는 그의 글자들은
희미하게나마 보르헤스의 얼굴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것은 눈 녹는 바위에서
발견된 예수의 상이라기보다는 타자기 활자로 만들어진 모나리자에 가까운 것이었다.
결단코 말하건대 현상 붙은 페이지의 이미지는 허구가 아니다.
2003. 10. 4. JJ.Lee ⓒ |